오피니언 사설

대통령이 나서도 왜 돈이 안 도는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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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시중의 자금경색이 쉽사리 풀리지 않고 있다. 정부와 한국은행이 아무리 돈을 풀어도 그 돈이 은행 창구를 넘어 흐르지 않는 것이다. 대통령까지 나서서 몇 차례나 기업자금을 대주라고 독려했는데도 여전히 그 모양이다. 급기야 이명박 대통령이 국무회의 석상에서 금융위원장과 금융감독원장에게 “책임있는 자세로 (중소기업 지원)업무에 임하라”고 재차 지시하기에 이르렀다. 이를 관치금융이라고 비판할 수는 없다. 지금은 평상시가 아니기 때문이다. 세계적인 금융위기 여파로 나라 경제가 위태로운 비상 국면이다. 그냥 놔둬서는 중소기업들이 줄줄이 도산하고 그 결과 은행을 포함한 금융회사들의 연쇄 부실이 뻔히 예상되는 상황이다. 관치 아니라 무엇이라도 해야 할 판이다.

대통령이 은행 대출까지 일일이 지시하고, 그런 지시가 은행에 먹히지 않으니 정부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고 있다는 증거다. 시중에 돈이 돌지 않는 것은 정부와 금융위, 한은, 시중은행들이 아무도 부담을 떠안지 않겠다는 보신주의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은행들은 건전성 지표인 국제결제은행(BIS) 자기자본비율이 떨어지는 마당에 억지로 중소기업 대출을 늘릴 수 없다고 볼멘소리다. 그러나 이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다. 자기만 살겠다고 돈줄을 조이면 멀쩡한 기업도 쓰러지게 되고 결국은 기존 대출마저 부실화될 수밖에 없다. BIS 비율이 문제가 아니라 은행 스스로를 위험에 빠뜨리게 하는 것이다.

정부와 금융위, 한은의 미온적 태도도 신용경색이 풀리지 않는 데 큰 몫을 하고 있다. 말로만 대통령의 지시를 복창할 뿐 누구 하나 책임지고 나서질 않는다. 은행의 BIS 비율이 문제가 된다면 이를 보완할 수 있는 대책을 진작에 마련했어야 할 것 아닌가. 금융감독·정책·집행 기능이 분산돼 효과적인 조치가 어렵다지만 지금은 한가하게 그런 이유를 따질 때가 아니다. 필요하다면 청와대·재정부·한은·금융위·금감원·시중은행이 참여하는 특별기구를 만들어서라도 당면 위기를 넘겨야 한다. 대통령이 이런 문제에 직접 개입하기보다 시스템이 돌아가게 만들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