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호씨 가족이 증언한 회령서 홍콩까지 북한大脫出 드라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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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지난 10월26일 오전4시.멀리 두만강 기슭의 길을 따라 국경을 지키는 인민경비대원들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갑자기 발걸음이 얼어붙었다.오한이 전신을 감쌌다.식은 땀이 등줄기를 타고 내렸다.미리 얘기는 됐고,사회안전원 崔영호(30)씨가 우리를 안전하게 도강시켜 주기로 됐지만 역시 인민경비대원을 보는 순간 우리는 부지불식간 긴장감에 휩싸이 지 않을 수없었다. 영문을 모르는채 새벽잠결에 끌려나와 칭얼대는 아이들의소리가 주변에 흩어지지 않게 달랬다.도강지점까지 다가가는 우리는 피가 거꾸로 솟는 느낌이었다.
그나마 崔씨가 묵묵하게 앞서서 길을 안내해 마음이 한가닥 위안이 됐다.싸늘한 두만강물이 깊은 곳은 허리께까지 차올랐지만 강건너로 보이는 카이산툰(開山屯)에만 닿으면 미국의 아버님이 미리 알선해 놓은 사람들이 도움을 주기위해 기다리 고 있으리란생각이 큰 힘이 됐다.
우리가 건넌 곳은 두만강 중에서도 지류에 해당하는 58초소 부근.강폭이 10여 정도로 좁은데다가 물이 많지 않았다.어른들이 어깨위로 아이들을 들어 강을 건넜기 때문에 아이들은 물에 젖지 않을 수 있었다.
음력 보름이었지만 흐린 날씨 탓에 일렁이는 강물만이 희미하게보일 뿐이었다.크게 굽이도는 강물도 수심이 낮아 제법 큰 소리를 내고 흘러 우리 일행을 안심시켰다.천운이라 생각했다.
모두가 한꺼번에 건너다가는 혹 발각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崔씨의 안내로 어른 2~3명에 아이 하나씩을 데리고 건넜다.나머지는 강가 갈숲에 숨어 차례를 기다렸다.
우리가 강건너에 도착한 것이 집을 떠난지 2시간만이니 강을 건너는데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린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내 60평생에 그렇게 힘들고 더디게 지나간 시간은 없을 것이다.속이 타들어갔다.
강을 모두 건너자 갑자기 원산에 거주해 같이 오지 못한 장녀명희(38)가족이 생각났다.애가 끊어지는 듯했다.
미리 물색해둔 중국동포 안내원들이 선양(瀋陽)까지 책임져 주기 위해 약속한 연락처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길을 재촉했다.이미지난 9월 선양에서 어머니와 짠 계획에 따른 것이기도 했다.
중국동포 안내원 두사람은 강변 마을의 한 민가로 우리를 안내했다.젖은 옷을 벗고 미리 준비해둔 중국 옷으로 갈아입었다.
룽징(龍井)과 선양에 이르는 길은 일가족으로서는 가장 힘들고도 긴장된 시간이었다.2대의 마이크로 버스에 나누어 타거나 시외버스를 이용했다.시간이 걸리더라도 주로 시골길을 이용해 선양으로 향했다.
창밖으로 펼쳐지는 끝없이 넓은 만주벌판과 마을 풍경,가을 햇살이 새롭게 느껴졌지만 우리는 모두 불안한 마음에 서로 아무런이야기를 나누지 못했다.다만 손자녀석들만이 무어라 재잘거리며 이국의 풍경을 즐기고 있었다.
천신만고끝에 우리는 11월초 미리 알선한 선양의 친지집에 도착했다.거기서 기다리던 어머니를 만났다.어머니는 다시 우리들을위해 옷가지를 준비해 두고 있었다.
모두가 새옷이라 눈에 띄는 데다 아이들의 경우 털이 달린 붉은색과 청색으로 똑같이 흰색 운동화를 신고 있어 염려되는 점도있었지만 괜한 생각이겠거니 하고 애써 넘겨버렸다.
이때부터 우리는 중국동포 안내원들을 따라 관광객 행세를 하며모두 같이 몰려다녔다.선양은 비교적 큰 도시인데다 중국동포들도많은 편이어서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았다.
홍콩으로 탈출하기 위해 기회를 엿보던 우리는 11월14일 선양에서 새벽에 출발하는 열차에 몸을 실었다.침대칸 3개에 나눠타고 의심받지 않도록 자연스럽게 가족단위로 행동했고 함께 탄 중국동포안내원들은 미리 준비한 인민폐로 열차내의 중국 공안원들의 검색을 피할 수 있게해줬다.
중국 공민증이 없다는게 가장 불안했다.모두 4천위안 이상의 돈(40만원 상당)이 뇌물로 쓰여졌다.이것은 우리 일가족이 선양에서 베이징(北京)까지 가는데 든 열차비용과 비슷한 금액이었다. 우리는 베이징 도착 당일 광저우(廣州)로 가는 징광(京廣)철도를 이용하려 했지만 시간이 맞지 않아 베이징 시내 관광으로 한나절을 보내야 했다.베이징에서는 미국에 사는 올케가 우리를 맞았다.마음이 한결 편안해졌지만 아직 안심할 순 없었다.천안문 광장과 인근 군사박물관을 돌며 사진도 찍고 식당에서 중국음식도 먹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우리 일행은 중국이라는 나라가 사회주의 체제이지만 북한과는 너무나도 다른 풍요로운 나라라는 느낌이 들었다.우선 먹을 것이 풍부했고 사람들의 표정이 밝았다.
남편이 지병인 중풍으로 불편해 어려움을 겪었고 특히 첫아이를가져 만삭이 된 막내 명순이가 쉬 피로해 하는 것같아 마음에 걸렸다.손녀인 충심(3)이와 봄(5)이도 오빠들과는 달리 자주칭얼거려 어른들을 조바심나게 했다.
홍콩 상수이(上水)난민수용소에서 건강검진을 받고 명순이의 태아가 건강하다는 결과가 나왔을 때 우리 가족들은 모두 안도의 웃음을 지었다.
우리는 14일 밤 다시 광저우로 가는 열차에 몸을 실었다.무려 32시간이나 걸리는 오랜 여행끝에 16일 새벽 광저우역에 도착했다.
우리는 도착하자 바로 이곳에서 소형버스 한대를 세내 선전(深수)으로 이동했다.홍콩으로 우리를 건네줄 배를 물색했다.
그러나 배는 버스나 승용차처럼 쉽게 구해지지 않았다.한달여 우리 가족이 중국대륙을 헤매며 천신만고끝에 홍콩이 보이는 곳까지 왔는데 여기서 일이 잘못되는게 아닌가 하는 망측한 생각도 들었다. 1주일이나 걸린 끝에 우리는 23일에야 어렵사리 낡은모터보트 한대를 구해 홍콩으로 향할 수 있었다.불과 15분만 달리면 중국영해를 벗어나 홍콩으로 갈 수 있다는게 현지인들의 말이었다.
중국공안에 걸리면 사살당할 수도 있는 위험도 따랐지만 달리 선택의 방법이 없었다.
마침내 우리가족을 실은 보트는 중국을 이내 벗어났다.홍콩 해안에 닿자마자 우리는 자진해 신고하고 난민신청을 했다.서울로 갈 수 있게 해달라는 희망도 분명하게 전했다.
그러나 혹시 서울행이 이뤄지지 않으면 어떡하나 하는 일말의 불안은 있었다.한국정부의 사람들이 우리를 만나 의사확인을 하고안심시켜 줄때서야 우리는 탈북망명이 이뤄진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었다.
모두가 고마울 뿐이다.우리를 따뜻하게 받아준 한국정부와 국민들,그리고 수용소 생활을 책임져준 홍콩 당국.
한국행 비행기를 타는 순간 원산에 두고온 큰딸 명희 가족의 얼굴이 다시 눈에 어른거렸다.

<종합=최상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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