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짚기>뇌물은 은밀한 공권력-연이은 검은돈 파동 해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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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전직대통령의 비자금파동속에 시작된 한해,뇌물파동의 끝은 보이지 않는다.장관과 은행장등 고관대작을 거쳐 버스업계와 영화업계등 업자들의 세계를 지나 급기야 땅속에 묻혀있는 서울시 하수관비리까지 터져나왔다.최고 권부에서 땅속까지 뇌물 의 홍수속에 구석구석 어디 하나 성한 곳이 없어 보인다.뇌물은 어떤 모습으로 우리 곁에 숨어있는가.검은 돈이 지배하는 어두운 세계로 먼저 들어가 보자.
슬롯머신사건으로 세상에 많이 알려진 정덕진씨는 사건이 있기 훨씬 이전인 90년초 엄삼탁 당시 안기부 기조실장의 부름을 받아남산 하얏트호텔옆 안가(安家)로 갔다.예비역 소장인 엄실장은 번쩍이는 견장의 군복을 입고 그를 맞이했다.엄씨는 대통령이 장군들에게 하사하는 장검인 삼정도를 그에게 보여준 적도 있었다.
엄실장이 정씨를 부른 용건인.협의할 일'이란“근처에 안가로 쓸만한 매물이 나왔으니 구입자금 3억5천만원을 빌려달라”는등의것이었다.정씨는 이런 엄실장의 태도에 내심 불쾌했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가 검찰에 붙잡혀 처음으로 실토한 거물 이 엄실장이었다.어쨌든 6공 권력자 몫의 뇌물은 이같이 도박에서 나와 폭력세계로 흘러가는 검은 돈의 일부였다.
현정부 들어서도 뇌물의 속성은 다를바 없다.기업의 뇌물은 대통령 집무실의 문을 지키고 있던 장학로 전청와대 제1부속실장과동거하던 여인의 계좌로 입금됐고,조직폭력배의 돈은“정신병자로 판정해 징집을 면해준다”는 조건으로 대구 병무청 관계자와 군의관의 주머니로 들어갔다.
이런 유형의 뇌물은 덩어리가 큰 치부형,다시 말해“뇌물로 부(富)를 쌓겠다”는 의도에서 출발한 것들이다.치부형과 반대되는작은 액수의 뇌물은 생존형이라 불린다.“뇌물로 한 재산 마련하겠다”는 도둑 심보가 아니라“살려다보니 어쩔수 없이 뇌물을 받는다”는 박봉의 하급 공무원 얘기다.일선 민원창구에서 담뱃값이라며 집어주는 급행료처럼 일상생활속에 스며들어있는 뇌물이다.생존형에 이르면 사실 뇌물과 선물,.작은 성의 표시'의 구분이 모호해진다.
***官權의 집중이 부패 불러 뇌물의 뿌리가 깊은 것은 이같은 선물.성의표시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다.심리학적으로 따지자면 엄마가 아기에게 쓴 약을 먹이면서“약 먹으면 사탕 줄게”라는 것도 일종의 뇌물과 같다.
근본적으로 인간의 이기적인 본성,사탕을 먹기 위해 쓴 약도 삼킬줄 아는 타산에서 뇌물은 출발한다.정덕진씨가 안기부 기조실장에게 돈을 준 것도 훗날 비리사건에서 자신의 배후로 이용하기위한 계산이었다.
정씨의 돈은 슬롯머신에 빠진 사람들의 주머니돈을 모은 것이다. 법률상 87%로 만들어 놓아야하는 기계의 승률을 터무니 없이 18%로 낮춰놓고 버젓이 손님의 돈을 뜯을수 있었던 것도 정씨등이 뿌린 뇌물의 힘이다.다시 말해 1백만원을 들고 노름을시작한 손님의 경우 법적으로는 13만원만 잃으면 되는데 정씨의뇌물 때문에 판돈의 69만원을 더 잃어야했다는 얘기다.삼풍사건의 경우 10여명의 공무원에 대한 뇌물이 6백여명의 목숨(실종자 포함)을 앗아가는 결과를 초래했다.
뇌물죄의 더 직접적 원인은.공무원의 직무'가 방대하고 재량권이 너무 막강하다는 구조적 문제다.후진국일수록 권력이 관(官)에 몰려있다.특히 인.허가 관련이 그렇다.올해 국회예결위자료에따르면 우리나라의 경우.공장설립 인.허가'에 필 요한 절차가 58단계,구비서류가 3백36부,처리일수가 9백25일이나 된다.
복잡한 행정절차가 뇌물과 부패의 서식처가 된다.
***낮은 형량도 범람에 일조 뿌리가 깊고도 넓은 뇌물이 뽑히지 않는 것은 1차적으로 호혜성(互惠性)때문이다.서로의 이기심을 이용한 것이기에 주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 모두에게 좋은 일이다.하지만 밝혀지면 죄가 된다.당연히 뇌물을 주고받은 공범은 모두 침묵한다.
더욱이 뇌물죄에 대해 상대적으로 가벼운 형량은 뇌물의 범람에일조한다.형사정책연구원의 양형실태 연구에 따르면 뇌물죄로 기소된 사람이 집행유예로 풀려날 확률(단순 수뢰죄의 경우 72.7%)은 상해죄보다 8.4% 높고,과실치사죄보다 무려 23.3%나 높다.삼풍사건으로 구속된 공무원 15명중 1년이 지난 뒤까지 수감중인 사람은 단 두명에 불과했다.뇌물이 가져다주는 막대한 이득을 생각한다면 한번 위험을 감수해볼만한 일이 아닐수 없다. 이같은 원인속에 해법도 있다.우선 이기심에서 출발한 행위인만큼 공직자의 윤리성회복이 최고의 처방일 것이다.그러나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긴 뇌물이기에 개인의 양심에 기댄다는 것은 요원하다. 가장 효율적인 대책은 뇌물이 서식가능한 구조의 개혁이다.관료의 권한을 축소.분산하고 의사결정을 공개화.민주화하기 위해 각종 법규,특히 관료의 재량권이 규정돼 있는 시행령등을 바꾸는 일이다.그리고 감사원.검찰.사법부,그리고 국회등의 감시기능이 강화돼 뇌물을 받으면 벌을 받음을 깨우쳐줘야 한다.
.아랫물'을 맑게할.윗물'들의 고귀한 책무(Noblesse Oblige)를 기대해보자.
〈오병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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