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국민이 공감할 수 있는 인권위로 거듭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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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국가인권위원회(이하 인권위)가 뭇매를 맞고 있다. 촛불집회와 관련해 “경찰이 과도한 무력을 사용해 집회 참가자들의 인권을 침해했다”며 경찰청장 등 책임자에 대해 경고 및 징계를 권고한 데 따른 것이다. 당시 폭력 시위로 수많은 전·의경이 크고 작은 부상을 입은 데 대해선 한마디 언급조차 없이 경찰 진압만 문제 삼은 인권위의 결정은 누가 봐도 균형을 잃었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경찰과 법무부가 즉각 반박한 데 이어 국정감사에서도 국회의원들의 성토가 잇따른 것이다. 일부 보수 단체들은 인권위 해체까지 주장하고 있다.

형편이 이런데도 인권위 측은 법과 원칙에 따랐을 뿐이라는 주장만 되풀이하고 있다. 인권위법에 의거해 국가기관, 지방자치단체, 구금·보호시설 등 공권력에 의한 인권 침해만 조사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인권위가 시위대에 짓밟힌 전·의경들의 인권까지 들여다볼 처지가 아니라는 얘기다. 그러나 이는 옹색한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인권위는 북한 인권에 대해서도 법 적용 대상이 아니라며 외면해 왔으나 여론의 질타가 이어지자 올 들어 6대 중점 과제에 포함시켰다. 또한 스포츠 분야의 성희롱 등 각종 차별 문제의 경우 민간 기업까지 폭넓게 조사 대상으로 삼고 있다. 인권위의 법 타령이 먹힐 수 없는 이유다.

인권위는 2001년 설립 이래 이념적 편향성에 대한 논란에 시달려 왔다. 좌파 성향의 시민단체나 시위대만 옹호한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러나 올해 초 안경환 인권위원장은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앞으론 삶의 질과 품격을 높일 수 있는 ‘일상적인 인권’을 중요시하겠다고 밝혀 변화를 예고했었다. 시위 문제에 대해서도 “정상적으로 수립된 정부에 폭력을 쓰는 것은 옳지 않다”며 평화 시위를 강조했다. 그러나 이번 촛불집회 결정을 통해 인권위는 스스로 천명했던 변화 의지를 단번에 거스르고 말았다.

인권위는 입법·사법·행정부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독특한 국가기구다. 어느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도록 인권기구에 독립적 지위를 부여하라는 이른바 ‘파리 원칙’에 따른 것이다. 이처럼 국제 규범에 따라 설립된 인권위는 입만 열면 국제적인 기준에 부합하는 인권을 실현하기 위해 애쓴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국제 기준보다 우선시돼야 할 것이 상식이다. 계속해서 국민의 공감을 얻을 수 없는 비상식적인 인권 정책을 연발한다면 인권위의 존립 근거마저 위태로워질 뿐이다.

인종 차별적 요소가 있다는 인권위 권고에 따라 몇 해 전 크레파스의 ‘살색’ 표기가 ‘살구색’으로 바뀌었던 건 신선한 충격이었다. 향후 인권위는 이처럼 일상적인 인권을 지키는 보편타당한 정책을 펼치는 데 주력해야 한다. 인권위가 국민의 지지를 받는 국가기구로 거듭나 굳건히 설 때 대한민국이 인권 선진국으로 가는 길은 더 빨라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