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 웰빙] 새우를 보쌈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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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나를 보낸다며 홀로 떠난 첫 베트남 여행. 뙤약볕을 가릴 천 몇 조각과 발만 편하면 문제없다는 나에게 식구들은 말라리아를 우려하며 걱정했다. 나그네의 수호신인 에르메스와 함께 하기에 "No problem !"이란 간결한 한마디를 남기고 떠났다. 호치민에 위치한 후에(Hue)왕실 음식전문점에서 요리를 배울 때다. 오랜 세월 동안 중국의 영향을 받았음에도 보석처럼 빛나는 베트남 전통의 맛을 그곳에서 만날 수 있었다. 음식은 기름지지 않아 담백했고 나뭇가지와 밭에서 갓 따온 향채를 쓰는 것은 태국을 닮았지만 그리 강하지는 않았다.

그 귀한 음식 중 하나가 차오돔이다. 월남쌈처럼 라이스 페이퍼에 온갖 재료를 놓고 싸먹는 요리다. 찜통에서 뿜어내는 수증기로 주방은 마치 스팀 사우나 같았다. 맨발의 주방 아가씨와 땀을 떨구며 열심히 차오돔을 만들었다.

그런 차오돔을 오늘은 딸아이가 아빠.엄마의 기념일을 맞아 저녁 메뉴로 '예쁜 짓'을 해 보겠단다. 곧바로 머리를 맞대고 적은 메모지를 들고 가락시장으로 향한다. 눈으로 한 바퀴 주-욱 돌아본다. 먹는 것을 즐기는 딸과 손이 큰 엄마의 합작품이 슬슬 시작된다.

큰 새우들이 탄력있는 몸집을 과시하며 줄을 맞춰 누워 있다. 이렇게 좋은 새우를 만난 건 "성공예감"이라며 흥분되어 주섬주섬 담는다. 그러나 아쉽게도 질긴 섬유질 속에 달착지근한 즙을 가진 사탕수수대를 찾을 수가 없다. 무엇으로 대신할까 망설이다가 요즈음 한창 봄 기운을 가득 머금은 아스파라거스를 한 다발 산다. 깨물면 오렌지빛 즙이 툭 터져 나올 것 같이 싱싱한 파프리카도 몇 개 고른다. 미나리 향조차 싫어하는 딸아이는 바질과 고수의 야릇한 향 앞에서 망설인다. 그런 딸아이를 위해 올망졸망한 작은 식용꽃도 한 움큼 산다. 어느새 보따리가 가득이다.

"새우의 본래 맛을 살리기 위해 양념을 절제해야 하고, 찜통에 찔 때는 반드시 김이 펑펑 오를 때 내용물을 넣어야 하고"하니까 "뜨거운 김은 위험하니 찜통에 넣고 내릴 때 주의해야 되지요"라고 딸아이가 거들어 설명한다. 조리과정을 주거니 받거니 설명하며 돌아오는 차 속에서 우리는 말로 근사한 요리 한 접시를 뚝딱 만들었다.

새우를 손질하는 딸아이의 손이 웃는 모습만큼이나 곱다. 친구들에게 음식을 곧잘 해주는 딸아이는 서툰 솜씨지만 다듬고 씻고 썰며 꼼꼼하게 밑손질을 한다. 끓는 물에 쌀국수를 데치고 아스파라거스를 손질하는 딸아이의 옆얼굴을 본다. 누군가를 위해 음식을 준비할 때 느끼는 행복함이 가득하다.

아스파라거스에 양념과 함께 곱게 간 새우를 도톰하게 감싼 후 김 오른 찜통에 넣고 살짝 찐다. 잠깐 사이에 고운 복사꽃이 되어 나온 새우의 변신에 남편과 딸은 어린 아이처럼 환호성을 지른다. 다시 한번 그릴에 불기운만 닿게 슬쩍 굽는다.

드디어 맛의 향연이 시작됐다. 호치민에서처럼 맥주잔에 얼음도 채운다. 세 식구가 둘러 앉아 부드러워진 라이스 페이퍼에 양상추부터 한잎 놓고, 쌀국수도 한 젓가락 올린다. 파프리카.숙주.바질.고수를 색 맞춰 놓는다. 마지막으로 구운 새우, 그리고 노란꽃도 한송이 올려 놓으니 나비라도 날아들 듯한 화사한 꽃밭이 된다. 아랫부분을 위로 한번 접고 양옆을 접어 넣은 후 위로 두루룩 말아 올린다.

딸아이는 삐죽삐죽 흘리며 말아 올리고 있는 아빠를 돕느라 또 바쁘다. 정성스럽게 싸서 한입 베어 문다. 라이스페이퍼가 부드럽게 입술에 닿고 아작거리는 양상추가 뒤따라 마중을 나온다. 복사꽃같이 고운 새우와 싱그런 초록의 아스파라거스는 달큰한 맛과 은은하게 뿜어내는 향기로 나를 취하게 한다.

남은 한 입은 소스에 살짝 찍어본다. 짭조름한 젓갈 내음이 코끝에 와 닿는다. 어느새 에메랄드빛 열대바다가 우리 식탁 옆에 와 있는 듯하다. 잔 부딪치는 소리와 정리되지 않은 부녀의 웃음 소리는 베트남 여가수의 노래와 섞여 밤 늦도록 계속됐다.

글=백지원(에스닉푸드 전문가)
사진=변선구 기자

*** 차오돔 맛있게 먹으려면

(1) 소금끼 많은 깐새우는 적합하지 않으니 껍질있는 새우를 준비하세요.

(2) 베트남에서는 사탕수수대를 사용해 달착지근한 맛이 새우에 배도록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구할 수 없어 아스파라거스로 대신합니다.

(3) 쌀국수는 찬물에 30분 불렸다 끓는 물에 30초 정도 데친 후 찬물에 헹궈 물기를 걷어주세요.

(4) 따뜻한 물에 살짝 넣었다 건진 라이스 페이퍼에 준비된 재료를 놓고 싸서 찍음장에 찍어 먹으면 됩니다.

(5) 곁들임 재료의 야채는 생으로 먹을 수 있는 것이면 어떤 야채라도 좋습니다.

(6) 구하기 힘들면 아스파라거스 대신 영콘 통조림을, 피시소스 대신 멸치액젓을 사용해도 됩니다.

(7) 라이스페이퍼와 쌀국수는 수입식품 가게에서, 아스파라거스.고수.바질.식용꽃.라임 등은 가락시장 특수야채 가게에서 구할 수 있어요.

*** 차오돔 만들기

▶난이도=중 ▶조리 시간=30분

▶재료=아스파라거스 12개, 새우살 450g, 돼지 비계 25g, 다진 양파 1큰술, 다진 마늘 1작은술, 녹말 1작은술, 설탕 1/2작은술, 소금1/2작은술, 달걀 흰자 1개, 식용유 약간

▶만들기=아스파라거스는 손질해 연한 앞 부분을 10㎝ 길이로 자른다. 새우와 양념 재료를 모두 넣고 푸드 프로세서로 부드러운 페이스트 상태가 되도록 간다. 손에 약간의 기름을 바른 후 아스파라거스의 앞 부분을 조금 남기고 새우 간 것으로 도톰하게 감싼다. 김이 오른 찜통에 4~5분 찐다. 찐 새우를 그릴에서 돌려가며 불 기운만 닿게 하듯이 슬쩍 구워 낸다.

▶곁들임 재료=라이스 페이퍼 12장, 삶은 쌀국수 100g, 양상추 12잎, 채썬 파프리카 1개분, 숙주 30g, 바질 12잎, 고수 12줄기, 식용꽃 12송이

▶찍음장=피시소스 1큰술, 물 2큰술, 라임즙 3큰술, 다진마늘 1작은술, 다진고추 1작은술

*** 에스닉 푸드(ethnic food)란

사전적 의미론 '민속음식'이지만 주로 인도.태국.베트남 등 제 3세계 전통 요리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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