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싸던 南대표에 "회담하자"… 절박한 식량 지원 감안한 듯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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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일 오후 14차 남북 장관급 회담이 열리고 있는 평양 고려호텔 앞 공터에서 군인들이 총검술 훈련을 하고 있다. 이들이 왜 총검술 훈련을 하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사진공동취재단]

14차 남북 장관급 회담이 끝난 지 한시간쯤 뒤인 7일 오전 11시40분 평양 고려호텔. 짐을 꾸리고 있던 정세현(59)남측 수석대표에게 긴급 연락이 왔다. "단독 접촉을 했으면 한다"는 권호웅(45)북측 단장의 전갈이었다. 權단장은 '상부의 위임'이라며 군사 회담을 수용키로 한 군부의 입장을 담은 문건을 또박또박 읽어내려갔다.

◆장성회담 왜 받아들였나=북한은 나흘간의 회담 내내 한.미 연합 군사 연습 중지를 요구했다. 장성급 회담 개최의 전제조건으로 삼았다. 그렇지만 權단장은 결국 회담장을 떠나는 남측 丁수석대표의 옷소매를 붙잡고 이를 스스로 뒤집어 데뷔무대 막판에 스타일을 구겼다. 權단장의 설명대로라면 군부가 회담판을 좌지우지한다는 얘기다. 丁수석대표는 서울로 귀환한 뒤 "군부가 강경입장을 바꿨는지, 아니면 그 상부에서 조정했는지는 알 수 없다"고 말했다. 또 "남측이 중시한 장성급 회담을 거부할 경우 다른 분야에 미칠 영향이 심각할 것이란 판단을 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동국대 고유환(북한학)교수는 "북측의 젊은 대표가 의욕을 갖고 버티려 했지만 결국 실리 때문에 무너진 것"이라고 평가했다. "한.미 군사 공조와 식량난이란 두가지 체제 위협 요소 가운데 우선 절박한 식량 지원 쪽을 택한 것"이란 게 高교수의 분석이다.

북측이 13차 회담 때 '조속 개최'하기로 한 군사 회담을 '개최'수준으로 재탕한 것이란 지적도 있다. 하지만 '군부에 건의한다'는 표현에서 '군부가 동의했다'로 바뀐 것은 진전이라는 게 회담 관계자의 말이다.

◆마지막 10분 무슨 얘기 오갔나=수석대표의 속내가 농축적으로 오갔을 것으로 판단된다. 북한의 군사 회담 수용에 따른 남측의 반대급부 제공에 교감이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丁수석대표는 "식량 얘기할 상황이 아니었다"고 부인했다. 정부는 북한이 장성급 회담 등에 호응해 올 경우 40만t 규모의 식량 지원이 가능할 수 있다는 복안으로 회담에 임했다.

양측이 결렬에서 극적 타결로 회담 모양새를 차린 취지대로라면 식량 지원 문제는 6월 2일 평양에서 열릴 9차 경협추진위 등에서 구체적으로 다룰 것으로 보인다.

이영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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