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민통선에 사랑의 학교를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6면

오늘날 우리 어린이들은 국가사회로부터 버림받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해마다 가족 해체, 경제적 문제로 거리에 버려지는 어린이들이 1만명을 넘는 것도 그렇지만 가족과 함께 지내는 어린이들도 제대로 양육되지 못하고 있다. 어린이들은 어머니 젖을 떼고 유치원에 들어가면서부터 고등학교 3학년에 이르도록 13, 14년 동안 대학입시라는 인생 최대의 고비를 넘어가기 위해 학원으로 내몰리고 있다. 그곳에서 우리의 어린이들은 경쟁과 이기심을 배운다. 오직 높은 점수를 얻는 자만이 우리 사회의 주류로 편입돼 잘살게 된다는 부모들의 부추김에 따라 어린이들은 동심을 잃어버린 채 거칠고 사나운 애어른으로 만들어지고 있다.

*** 닭장에 갇혀 사는 어린이들

어린이들은 유년 시절, 청소년 시절에 사물에 대한 선한 의지와 아름다움.감동을 각인한다. 그러나 우리의 어린이들은 무지개를 보고도 가슴이 뛰지 않으며, 개구리를 보고도 도망친다. 친구를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잠재적 경쟁자로 인식한다. 답답한 아파트와 밤이 이슥토록 불 켜진 학원의 숨막히는 '닭장'에 갇혀 살고 있다. 아이들은 버릇이 없다. 예절을 모른다, 말씨가 거칠다고 어른들은 볼멘소리들을 하지만 어린이들이 어떻게 양육되고 있는지를 아는 사람이라면 차마 어린이들에게 그런 나무람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어린이들이 불쌍한 것은 대학에 들어가 성년이 됐을 때 그들은 이미 우리의 어린이들이 아닌, 그렇다고 세계인도 아닌 정체불명의 어린이들로 성장해 있다는 것이다. 한국인으로서의 전통.문화.의식.역사.예절이라는 우리 고유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채 어린이들은 껑충한 키와 큰 몸뚱이를 가진 낯선 인간들이 돼 있다. 어린이들에게 생물학적인 한국인의 유전인자를 물려주는 것만으로는 그들에게 한국인으로서의 자긍심을 심어줄 수 없는 일이다.

어린이들이 세계를 향한 한국인으로 자라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비키니 섬의 거북이처럼 어린이들이 방향감각을 잃고 산으로 올라가는 것을 방치하고 있다. 어린이들은 자연이라고 하는 교과서를 펴본 일이 없고, 이웃이라고 하는 교실에서 강의를 들어본 일이 없다. 만일 어린이들을 이대로 계속 방치한다면 우리 사회의 장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어린이들을 미래의 희망으로 키우려면 더 늦기 전에 어린이들에게 우리의 정체성을 심어 줄 방안을 생각해봐야 한다.

그러한 일들이 오늘의 학교나 사교육을 통해 달성되기 어렵다는 것은 우리가 공감하고 있는 대로다. 어린이들에게 자연과 사회학습을 통한 어린이 문화 창달이 절대로 필요하다. 지자체나 정부가 어린이들에게 자연과 공동체에 대한 사랑과 봉사의 마음을 심어주고, 우리가 누구인가를 가르쳐줄 대안학습 프로그램을 만들어야 한다.

*** 방정환 모델 다시 살려야

나치하의 유겐트나 북한의 소년단을 빗대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이웃이 사랑의 대상이고, 이 땅의 흙과 햇빛이 우리의 몸을 만들어낸 정토라는 것을 가르쳐 줄 사랑의 교실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다행스럽게도 그런 모델을 가지고 있다. 가령 소파 방정환 선생 같은 분은 일찍이 어린이들에게 민족혼을 불어넣어주고, 사랑을 심어주기 위해 일생을 바쳤다. 찾아보면 그런 모델을 새롭게 가다듬어 볼 수 있을 것이다.

가령 민통선에 사랑의 학교를 세워 이 땅의 산.들.강.나무.꽃들을 보여주고, 장차 남북의 어린이들이 함께 분단의 철책을 걷어내고 하나가 될 수 있는 길도 가르쳐주는 그런 학교도 세움직하다. 어린이들을 이대로 몰아대고서는 개혁도, 국민소득 2만달러도 짠맛을 잃어버린 소금과 다를 바 없게 될 것이다. 어서 빨리 어린이들에게 그들이 누구이고, 누구여야 하는지를 가르쳐 줘야 한다. 어린이날을 맞아 진정으로 어린이들에게 줘야 할 선물이 무엇인지를 함께 생각해봤으면 한다.

김석성 부안여중고 재단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