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에디터 칼럼

'나쁜 주식'이라던 리먼 누가 사갔나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1면

'나쁜 주식’을 사려고 했다는 이유로 동네북이 된 사람이 있다. 여기서 나쁜 주식이란 도산한 미국 4위의 투자은행 리먼브러더스를 말한다. 매를 맞는 이는 민유성 산업은행장이다. 매도 보통 매가 아니다. 거의 집단구타 수준이다.

야당은 물론 여당 의원들까지 나서 회초리를 들었다. 홍준표 한나라당 원내대표는 “리먼 인수 시도는 어이없는 발상”이라고 질타했다. 국책은행 최고경영자(CEO)가 곧 망할 기업을 인수해 우리 경제에 큰 부담을 줄 뻔했다는 것이다.

같은 당 고승덕 의원은 그가 리먼 한국 대표를 지낼 때 본사에서 받기로 한 스톡옵션을 염두에 둔 행동이라는 식으로 몰아붙였다. 개인 이익을 위해 이런 딜을 추진했다는 얘기다. 그러나 이건 뭘 모르고 하는 소리다. 민 행장은 이미 스톡옵션 포기 의사를 산업은행 이사회에 서면으로 전달해 놓았기 때문이다.

금융을 좀 안다는 사람들까지도 야단이다. 왜 이렇게 시끄러운지 이해는 된다. 부실이 얼마나 심각한지 잘 모르고 덥석 안았다 낭패를 볼 수 있기 때문이리라. 그럼에도 민 행장의 시도는 욕먹을 일은 아니다.

원래부터 나쁜 주식은 없다. 좋은 주식도 마찬가지다. 있는 건 가격뿐이다. 가격에 따라 좋은 주식, 나쁜 주식이 가려진다는 얘기다. 남들이 좋다 해도 내가 산 뒤 값이 떨어지면 나쁜 주식이다. 지금은 형편없지만 앞으로 오를 가능성이 있는 주식이 좋은 주식이다. 내가 보기에 민 행장은 나쁜 주식이 아니라 좋은 주식을 사려고 했다.

 한국 금융기관에 월가의 대형 투자은행들은 감히 쳐다볼 수도 없던 까마득한 벽이었다. 그들의 높은 콧대는 그들의 주가만큼이나 높았다. 158년 역사의 리먼은 부동산 버블 붕괴와 그로 인한 파생상품 거래에서 엄청난 손실을 보고 빈사 상태에 빠졌다. 자연 주가는 추풍낙엽 같았다. 마침내 국내 은행들도 넘볼 수준이 됐다.

위기에 몰린 리먼 경영진은 해외의 유력 금융기관에 도움을 청했다. 산업은행에도 손을 내밀었다. 리먼 내부 사정을 잘 아는 민 행장은 바로 월가로 날아갔다. 리먼을 잘만 사면 큰 재미를 볼 수 있을 걸로 생각했다. 그는 부실 덩어리를 인수하려 했던 게 아니다. 리먼의 CEO를 만난 그는 부실 자산은 떼어낼 것을 요구했다. 부실 자산은 배드뱅크(bad bank)로 몰고 우량 자산(good bank)만 사겠다고 했다.

인수대금은 지금이 아니라 내년 2월 말 지급한다는 조건도 달았다. 지금은 괜찮아 보이지만 앞으로도 부실화할 수 있는 물건들이 더 생겨날 수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6개월이면 리먼의 환부가 거의 다 드러날 것으로 그는 판단했다. 리먼은 이런 조건을 다 수용하겠다고 했다. 두 CEO는 최종 가격 흥정을 위해 테이블에 앉았다. 하지만 양측의 의견 차는 컸다. 리먼은 주당 17.5달러를 불렀고, 민 행장은 6.4달러를 제시했다. 가격 차가 좁혀지지 않으면서 결국 협상은 깨지고 말았다.

믿었던 한국의 국책은행이 협상장을 떠나자 월가는 동요했다. 리먼에는 “내 돈 돌려달라”는 고객들이 몰려들었다. 하루 수백억 달러의 인출 요구를 견뎌낼 재간은 없었다. 리먼은 결국 파산신청을 할 수밖에 없었다.

망가진 회사를 인수해 가치를 높이는 게 기업 인수·합병(M&A)의 기본이다. 그런 점에서 산업은행은 아쉽기 그지없다. 글로벌 네트워크를 앞세워 돈 되는 정보를 움켜쥐는 미국의 투자은행을 자회사로 거느릴 수 있는 호기를 놓쳐버렸기 때문이다.

 산은이 포기한 뒤 영국의 바클레이즈가 곧바로 리먼의 미국 법인을 채갔다. 바클레이즈는 리먼의 아시아 법인도 노렸다. 하지만 일본의 노무라증권에 빼앗겼다. 노무라는 리먼의 유럽 법인과 한국 법인 인수도 추진하고 있다 한다. 리먼의 지역별 법인 인수전에는 영국계 스탠다드차타드와 중국의 시틱(CITIC)그룹도 가담했다. 나쁜 주식이라면 이렇게 경쟁적으로 달려들었을까.

미국 투자은행 1, 2위인 골드먼삭스와 모건스탠리도 이번 위기에 큰 타격을 받고 새로운 주주를 찾아 나섰다. 불세출의 투자가 워런 버핏이 골드먼삭스 주식을 50억 달러어치나 사기로 했다. 자산규모 세계 최대 은행인 일본의 미쓰비시UFJ는 모건스탠리 지분을 최대 20%까지 인수하기로 했다. 하지만 이들 나라에서 ‘정신 나간 투자’라는 비난이 쏟아지고 있다는 소리는 아직 듣지 못했다.

절대 손해보면 안 된다며 가만있으면 그만인가. ‘무위험 무수익(No Risk No Return)’은 세상의 모든 거래에 적용되는 법칙이다. 기회가 왔는데도 뒤탈이 두려워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그게 바로 직무유기다.

심상복 경제부문 에디터

[J-HOT]

▶'일본은 아시아가 아니다' 그들의 논리는…

▶'대마도는 우리땅' 거꾸로된 지도 나왔다

▶서정희 "공부시켜주고 친정도…"남편믿고 동거부터

▶최수종 "어린시절 노숙자 생활, 하희라 유산" 고백

▶"하루에 커피 5~6잔 마시는데…" 자판기족들 경악

▶6·25전쟁 피란 간 시절 여성들 생리 어떻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