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금융위기 대응, 시장 흐름 살피며 반 박자 늦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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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미국이 7000억 달러의 공적자금 투입을 통한 과감한 응급수술에 나섰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미 경제가 전례 없는 곤란에 직면했고, 우리는 전례 없는 수단으로 대응해야 한다”고 했다. 절박한 위기감이 묻어 나는 발언이다. 지금 미국은 정책 총동원령을 내린 상태다. 중앙은행의 특별융자(베어스턴스)와 국유화(AIG), 주식 공매도 금지, 주요 6개국 중앙은행의 협조 개입 등이 모두 망라돼 있다.

이번 조치는 미 금융시스템이 과다 출혈로 인해 쇼크사에 빠지지 않도록 하는 응급 처치다. 그동안 자체 복원력을 상실한 미 금융시장은 정부의 광범위한 개입을 주문해 왔다. 시장의 실패를 자인하고 정부 지원을 자청한 것이다. 미 재무부는 불안감을 잠재우기 위해 사상 최대의 공적자금과 거의 무제한의 부실 채권 매입 권한을 허용해 달라고 미 의회에 요청했다. 다행히 안도감이 퍼지면서 세계 주요 증시는 반등했고, 꽉 막혔던 돈줄도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응급수술은 말 그대로 외과적 처치에 지나지 않는다. 과다한 가계 부채와 주택시장의 거품, 소비 위축 등 미국 경제가 안고 있는 근본적인 종양은 그대로 남아 있다. 우리 경제는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을 받아 잠시 살아났다가, 그 후 2년 가까이 강도 높은 구조조정과 극심한 경기침체에 시달렸다. 미국도 비슷한 전철을 밟을 가능성이 크다. 미 정부의 공적자금이 부실을 메우기에 충분할지도 의문이다. 7000억 달러는 지금까지 드러난 부실 채권은 넉넉히 감당하겠지만, 숨겨진 부실이나 추가 부실까지 고려하면 턱없이 부족할지 모른다. 케네스 로고프 하버드대 교수는 “앞으로 1조~2조 달러의 긴급자금이 수혈돼야 한다”고 경고한다.

지금은 어떤 일이 일어나도 놀라지 않을 만큼 위기 상황의 연속이다. 미국의 파생상품 손실은 아직 종잡을 수 없고, 주택가격은 여전히 하락 중이다. 긴장을 풀지 말고 미국의 뇌관 제거 수술을 차분히 지켜봐야 할 때다. 이런 점에서 “상황에 앞질러 선제적으로 대응하고, 돌발 상황에는 기민하고 적극적으로 움직여야 한다”는 이명박 대통령의 발언이 걱정스럽다. 경제 상황이 급변동할 때 잘못된 예단은 위기를 증폭시킬 수 있다. 시장 흐름에 순응하면서 오히려 반 템포 늦게 대응하는 게 정석이다. 무엇보다 위기에 맞설 유일한 실탄인 외환보유고는 함부로 축내선 안 된다. 1929년 미국 대공황은 3년 뒤에야 겨우 바닥에 도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