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시평

독서의 계절에 읽을 만한 ‘국산’이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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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다. 그런데 서점에 가면 읽을 만한 국산 신간을 발견하기 힘들다. 국산 신간이라야 대부분 중·고생을 위한 참고서 수준이거나 아니면 깊지 않은 지식을 그럴듯하게 포장한 책들이다. 이런 책들은 통조림화한 지식이기에 신선도가 낮을 뿐 아니라 푹 고아 우려낸 곰탕국처럼 깊은 맛도 기대하기 힘들다. 이 때문에 신간 국산 책을 읽으면 감동이 생겨나지 않는다. 그런 탓인지 신문 서평을 보아도 모두 외국산 번역서뿐이다.

프랑스의 저명한 사회학자 자크 엘루는 정보 및 지식사회를 비판하면서 자료-정보-지식-지혜로 이어지는 지식의 서열 체계가 무너지고 있다고 말했다. 자료가 정보로, 정보가 지식으로, 지식이 지혜로 끊임없이 탈바꿈돼야 하는데 오늘날 지식정보 사회에선 대부분 지식이 지혜로 도달하기 전에 멈춰버리고, 심지어 자료와 정보에서조차도 벗어나지 못한다는 의미다. 그러니까 수많은 자료와 정보가 인터넷에서 교환되지만 그 대부분은 지혜 차원에 도달하지 못하는 지식의 미숙아 내지 지진아다.

미국 경영학의 대부라 불리는 피터 드러커는 ‘지식경영’을 강조했지만 지식경영의 총아라 할 수 있는 미국의 투자금융회사들, 즉 베어스턴·리먼브러더스·메릴린치 등의 붕괴는 지혜로 이어지지 않는 지식과 정보가 얼마나 취약한지 새삼 말해주고 있다. 따라서 드러커식 지식경영은 마땅히 ‘지혜경영’으로 바뀌어야 하고, 여기서 지식에서 지혜로의 탈바꿈이 상대적으로 용이한 ‘국산’의 중요성이 대두된다. 문제는 오늘날 국산 지식의 생산이 과거만 같지 못하다는 점이다.

한국의 지식산업이 이렇게 지지부진하게 된 데는 무엇보다 학자들 책임이 크다. 학자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좋은 책, 수준 있는 논문을 만드는 일인데 언제부터인지 우리네 학자는 자신의 생존을 위해 공장에서 물건 찍어내듯이 논문을 양산하고 있다. 물론 이런 현상을 학자들 탓으로만 돌릴 수 없다. 우리 대학들이 경쟁이란 이름 아래 교수들에게 매년 논문 쓰기를 강요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위 공직자로 임명된 교수 출신 일부가 논문 중복 게재의 불명예를 뒤집어쓰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그래서 한국 교수들은 ‘논문 쓰는 기계’가 되었고, 한국 대학은 ‘논문 만드는 공장’이 되었다는 자조적인 우려의 목소리가 점차 힘을 얻고 있다. 이런 체제하에선 아인슈타인 같은 최고의 물리학자도 교수로서 살아남기 힘들다고 한다. 그가 평생 쓴 논문이라야 몇 편 안 될 텐데 매년 7~8편 이상의 논문을 써야만 우수 학자로 인정받는 한국 대학 풍토에서 어떻게 견뎌낼 수 있겠는가? 잔챙이 학자 수백 명보다 아인슈타인 같은 큰 학자 1명이 한국의 지식산업을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대들보 역할을 할 텐데 우리 대학은 아직도 영양가 없는 학자들만을 양산하는 데 골몰하고 있다.

물론 미국에서도 교수가 정년을 보장받으려면 우선 논문 쓰는 기계가 되어야 한다. 박사학위란 지도교수 없이 논문을 쓸 수 있는 자격증에 불과하기에 초임 교수 시절에는 연습으로도 논문을 많이 써야 한다. 마치 운전면허증을 받더라도 운전연습이 필요한 것처럼. 그러나 정년을 보장받으면 오로지 본게임을 준비해야 한다. 그리고 본게임의 하이라이트는 후학에게 부끄럽지 않은 한 권의 멋있는 책을 남기는 일이다. 이것이 진리를 추구하는 학자의 참모습이자 학문 세계의 지식을 지혜로까지 끌어 올리는 토대인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 대학은 연습게임에 이기는 것으로 자족하는 것 같다. 그래야만 대학 순위도 올라가고, 교수들은 더 많은 연구비를 타낼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과거 인적자원부가 조 단위의 막대한 돈을 투자한 ‘두뇌한국(brain Korea) 21’은 양화(良貨)가 아니라 오히려 악화(惡貨) 역할을 하고 있다. 질이 아니라 양에 입각해 있어서다. 이런 이유인지 그 혜택을 받는 학자 중에는 ‘두뇌 코리아’가 아니라 ‘바보 코리아’라고까지 부른다.

지난여름 읽었던 김형효의 『철학적 사유와 진리에 대하여』는 학자의 길이 어떠해야 하는지 새삼 깨우쳐준 책이다. 저자는 이 한 권의 책을 위해 평생을 바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동서양 철학을 두루 섭렵하면서 우리에게 담담한 지혜를 제시하고 있다. 첼리스트 장한나가 수준 높은 연주를 위해 하버드대 철학과에 복학했다는 소식을 듣고 묵직한 철학서를 한번 소개해 보았다.

김정탁 성균관대 교수· 언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