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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진 시시각각

정보부가 진리를 추구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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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국정원이 발표한 새로운 원훈(院訓)은 ‘자유와 진리를 향한 무명(無名)의 헌신’이다. 유감스럽게도 이는 정보기관이 추구해야 할 가치와 어울리지 않는다. 자유라니 무엇으로부터의 자유인가. 정권이 국민의 자유를 탄압할 때 국정원은 정권에 봉기(蜂起)할 수 있는가. 현실에 맞지 않는 구호다. 그런 게 아니면 국정원이 말하는 자유는 공산주의와 대립하는 자유민주체제를 가리키는 것 같다. 냉전 시절엔 자유와 공산의 대립이 핵심 갈등이었지만 지금 냉전은 사라졌다. 주요국 정보기관은 공산 세력 대신 각양각색의 새로운 위협과 싸운다. 종교·영토·자원·종족, 그리고 경제적 이익을 둘러싼 갈등이다. 이런 21세기에 자유라는 개념이 정보부의 모토로 적합한 것일까.

 진리라는 표현은 더 이상하다. 진리는 진실이나 참된 이치, 참된 도리를 말한다. 진리는 학문이나 종교의 영역에서 추구하는 것이지, 정보기관이나 군대 같은 국가적 영역의 가치는 아닐 것이다. 서울대의 상징 문장은 ‘Veritas lux mea(진리는 나의 빛)’고 육군 제3사관학교의 모토는 ‘조국·명예·충용’인 것이다. 미국 육사 웨스트포인트도 ‘의무·명예·조국’이다.

역사적으로 정보기관의 가치는 진리가 아니라 국익이었다. 민주주의 확산이 진리처럼 되어 있던 20세기, 미국의 중앙정보국(CIA)에 정작 중요한 것은 민주주의가 아니었다. 1961년 박정희 소장이 쿠데타를 일으켜 장면 총리의 민주 정권을 무너뜨렸을 때 CIA의 한국지부장은 피어 드 실바였다. 실바는 회고록 『서브 로사(Sub Rosa-the CIA and the uses of intelligence)』에서 이렇게 적었다. "장면은 도덕적 기준에서 보면 모든 것이 훌륭하다. 그러나 그의 신사적이고 온화한 리더십은 한국 정치상황을 통제하지 못했다. 반면 박정희의 리더십은 제퍼슨(Jefferson·제3대 미국 대통령)적인 민주주의 모델은 결코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리더십은 진취적·창의적·건설적이었으며 당시에는 확실히 적합한 것이었다”. CIA는 장면의 허약한 민주주의보다는 박정희의 실용적 개발독재를 지지했다. 국익이란 가치는 불변이다. 9·11이 터지자 미국은 파키스탄의 무샤라프 독재와 깊숙이 거래했다.

각국의 정보기관은 모토에 이런 세속적 지혜를 담고 있다. 중국의 국가안전부는 ‘정예 간부들은 당에 충성해야 한다’, 영국 보안부(SS)는 ‘왕실을 보호하라’다. 국가 핵심에 대한 충성을 강조한 것이다. 가장 일반적인 모토는 국익에 대한 봉사다. 호주 보안정보부(ASIO)는 ‘국가안보 위협으로부터 국가와 국민을 보호한다’, 캐나다 보안정보국(CSIS)은 ‘국가 안보와 국민 안전을 보호하는 데 헌신한다’다. 숨어서 일하는 특성을 담은 것도 있다. 프랑스의 국토감시국(DST)은 ‘음지에선 엄격하게, 양지에선 냉철하게’다.

미 CIA 모토엔 진리란 표현이 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다. 그러나 이는 요한복음 구절이며 여기서 진리는 하나님을 가리킨다. 미국은 기독교 국가여서 이런 표현을 잘 쓰는데 지폐엔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In God We trust)’라는 말도 있다. CIA의 그런 모토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CIA도 웹사이트엔 단순·명료하게 ‘국가의 기관, 정보의 중심’이라고 적는다. 국익과 정보라는 핵심을 찌른 것이다.

 새 정권의 국정원이 변신의 의욕을 보이고 있다. 지금의 모토 ‘정보는 국력이다’는 김대중 정권이 만든 것이므로 국정원은 이것도 바꾸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문학적 맛은 없지만, 그리고 제대로 실행되지는 못했지만, 이 모토 자체는 현실에 맞는 얘기다. 정보기관은 국익이 생명이고 그를 위해선 비(非)진리의 길도 걸어야 한다. 그런 기관이 왜 진리라는 미명(美名)으로 스스로를 옭아매려 하는가.

김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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