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30년 신자유주의의 종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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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정부, 큰 시장'을 모토로 하는 신자유주의가 위기를 맞고 있다. '종주국'이라 할 미국이 금융위기를 맞으면서 정부의 시장 개입이 잇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규제를 강화하거나 새로 마련하는 움직임도 분주하다. 외환위기 뒤 미국식 금융자본주의를 지향해온 한국에게도 남의 일이 아니다. 다음은 중앙SUNDAY 보도 전문.

2008년 9월 19일. 후대의 역사가들은 이날을 미국은 물론 세계 자본주의 역사에 한 획을 그은 날로 기록할지 모른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이날 금융위기를 잠재우기 위해 전방위 시장 개입과 공적자금 투입을 선언했다. 이는 경제의 작동은 시장에 최대한 맡기고 정부는 게임의 룰만 잘 관리하면 된다는 신자유주의 정신의 퇴장으로 해석할 만하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의 칼럼니스트인 크리스티나 프리랜드는 20일자 칼럼에서 “로널드 레이건 시대가 공식적으로 막을 내렸다”고 했다. 모기지 회사인 패니메이와 프레디맥을 국유화하고 AIG에 구제금융을 투입한 데 이어 전방위 공적자금 투입이란 ‘마지노선’까지 넘은 미국이 지난 30년간 주창해 온 신자유주의 노선을 스스로 내던진 셈이 됐다는 것이다.

1980년 레이건 행정부의 등장 이후 미국은 규제 완화와 감세 등 ‘작은 정부와 큰 시장’ 정책을 일관되게 추진해 왔다. 특히 금융시장에 대한 정부의 직접 개입은 금기로 여겨 왔다.

하지만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에서 비롯된 월스트리트의 붕괴가 상황을 바꿔놨다. 19일 부시 대통령은 ‘전례 없는 조치’를 하겠다고 공언했다. 대규모 공적자금을 통해 부실을 정리하겠다는 내용이다. 그는 “심각한 위기로부터 미국 경제의 건전성을 지키기 위해 지금 행동에 나서야 한다”며 정부 개입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개입의 폭은 상상을 초월할 전망이다. 미 정부는 8000억 달러 이상의 세금을 투입해 부실채권 처리 기구를 설립할 예정이다. 민주당은 여기에 더해 중산층과 서민을 위한 대규모 재정 투입 방안까지 요구하고 있다. 결국 이번 사태로 동원될 공적자금과 재정 투입 규모는 1조 달러를 넘어 2조 달러에 달할 것이란 예상이 나온다. 그 과정에서 무수한 금융회사와 기업이 사실상 국유화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정부는 새로운 시장 질서를 명분으로 파생상품 등에 대한 다양한 규제 카드를 내놓을 전망이다. 주간 비즈니스위크는 18일 “30년간 미국 경제정책의 근간을 이루던 규제 완화가 강화쪽으로 급선회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월스트리트 저널도 “80년대 이후 규제는 약해야 한다는 신념을 고수하던 미국 정부가 적극적 행동주의로 복귀했다”고 전했다.

시장 개입을 반대하는 목소리는 미약하다. 보수파 공화당 의원 100명가량이 벤 버냉키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과 헨리 폴슨 재무장관에게 대형 금융회사를 더 이상 구제하지 말라고 요구하는 편지를 보낼 예정인 것 정도다. 이들은 “구제 조치가 막대한 국민 세금을 축내는 것은 물론 도덕적 해이를 부추긴다”며 “지금은 기업이 아니라 납세자를 구제해야 할 때”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시장은 부시 대통령의 조치에 두 팔을 들어 환영했다. 미국과 유럽·중국 등 세계 증시가 폭등했다. 주요 기업 CEO들도 “시장의 불확실성을 제거하는 일”이라며 찬성 입장을 밝혔다. 스스로를 규제 철폐주의자로 규정해온 존 매케인 공화당 대통령 후보도 “적절한 규제가 국민을 보호할 것”이라며 입장을 바꿨다.

이제 미국식 신자유주의는 설 땅을 잃어 가고 있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조셉 스티글리츠 컬럼비아대 교수는 “금융위기는 장사가 잘될 땐 정부 개입을 거부하고, 위기가 닥치면 정부에 손을 벌리는 위선의 결과물”이라고 지적했다. 거물 투자자인 조지 소로스는 지난 1월 다보스 포럼에서 “금융시장의 자율성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인식”이라며 ‘시장이 정부보다 효율적’이란 신자유주의의 근본 가정에 의문을 제기했다.

정부의 적극적인 역할을 강조하는 케인스식 경제정책에 반기를 든 신자유주의는 79년 영국 대처 정부가 민영화와 감세, 복지 및 재정 축소를 추진하면서 유력한 정책 수단으로 떠올랐다. 80년 집권한 레이건 대통령의 ‘레이거노믹스’는 클린턴 행정부를 거쳐 부시 행정부로 계승됐다. 97년 말 아시아 외환위기는 ‘세계화’와 ‘개방’으로 포장된 신자유주의를 한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가 받아들이는 계기가 됐다.

조순 서울대 명예교수는 “자본주의 시스템도 세월에 따라 노화하는 게 당연하다”며 “파국을 맞은 신자유주의의 대안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장하준 영국 케임브리지대 교수는 “외환위기 뒤 한국은 미국식 신자유주의 노선을 따라왔다”며 “종말은 아니더라도 한계가 드러난 이상 이를 추종해온 기본 노선의 수정이 필요해 보인다”고 지적했다.

나현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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