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그 이전에 그는 동유럽을 대표하는 극작가이기도 했다. 당시 검열로 사회적 발언을 극에 담을 수 없었던 동유럽의 다른 연극인들처럼, 하벨도 부조리극의 형식 속에 정치적 상황을 우스꽝스럽게 녹여냈다. 체코와 유럽의 연극애호가들은 모두 그의 숨겨진 의도를 이해했다. 그 하벨이 20년의 침묵을 깨고 이번에 신작 ‘떠난다는 것’을 발표한 것이다.
극은 여성편력이 심한 한 정치지도자가 권력을 넘겨주면서 겪는 갖가지 사건과 상실감을 다룬다. 체홉의 ‘벚꽃 동산’을 형식적인 틀로 삼고,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을 내용적으로 차용하고 있다. 당연히 희극적 붓질과 비극적 붓질이 교차되면서 극은 정치적 삶과 개인적 존재의 부조리를 절묘하게 희화한다.
구조는 복합적이다. 벚꽃 동산의 무대 위에서 20명의 배우들이 각자 자기에게 주어진 일상의 행위들을 펼쳐나가, 얼핏 산만해 보이기까지 한다. 하지만 하벨은 자신의 육성으로 녹음된 무대지시를 통해 극에 개입하면서 배우들의 지나친 감정연기를 막기도 하고, 극의 결함에 대해서 작가의 책임 없음을 뻔뻔스럽게 주장하기도 하면서 무대 위의 사건을 조정한다. 그러면 이 극의 연출자인 데이비드 라독은 배우들로 하여금 작가의 무대지시를 충실히 따르게 하는 척하다가 때로는 전혀 무시하게 함으로써 작가의 연출을 또 다시 연출한다. 이 이중의 서사적인 구조를 통해서 극의 감상성은 철저히 배제되고 사유성은 깊어진다.
떠난다는 것’은 특히 하벨의 자전적 이야기가 암시적으로 드러나 관객의 호응이 뜨거웠다. [디발도 국제연극제 제공]
특히 총리관저를 떠나라는 정부로부터의 통보로 스스로 권력에서 완전히 추방되었음을 인식하는 순간, 그 동안 자기를 도왔던 보좌관들이 새로운 권력을 좇아 떠나고, 이레나마저 그의 배반을 더 이상 용서하지 못하겠다며 떠난다. 그때 이 노정객은 비바람 몰아치는 광야에서 리어처럼 들꽃 왕관을 쓴 채 억수 같이 쏟아져 내리는 비를 맞으며 자신의 ‘떠남’에 대해서, 타인의 ‘떠나감’에 대해서, 삶의 배반에 대해서 노호하는데, 이 장면에서 나는 숨을 쉬지 못할 만큼 공감했다. 모두가 떠난 텅 빈 무대의 바닥에 그동안 심어져 있던 벚꽃 나무들이 천천히 밑둥 잘린 모습으로 공중에 떠오르면서 극은 끝난다. 지상의 낙원이 뿌리를 뽑혀 공중을 헤매는 것처럼. 현대의 연극이 이만큼 진실할 수 있다면 지금 연극의 위기 따위는 논의되지 않을 것이다.
주최 측의 배려로 나는 극작가 하벨 전 대통령을 따로 만날 수 있었지만, 사람들이 계속 사인을 받으러 몰려드는 바람에 깊은 얘기는 나누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자그마한 체구, 작품에 대한 나의 반응을 경청하는 모습, 관객들에게 자신의 이름 밑에 일일이 하트를 그려주며 사인해주는 그 온화한 모습. 우리에게 이런 전직대통령과 이런 위대한 극작가가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그와의 만남은 연극 이상의 감동으로 나를 전율케 했다.
프라하=김윤철 (국제연극평론가협회장·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교수)
◆바츨라프 하벨=1936년 체코 프라하에서 태어났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1948년 체코에 공산정권이 수립된 후 부르주아출신이라는 이유로 정규 교육을 받지 못했다. 이후 작가의 길로 매진, 63년 희곡 『뜰의 축제』로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 이후 반체제 운동가로 활동하다 89년 체코슬로바키아의 마지막 대통령, 93년 체코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을 지냈다. 96년 아내 올가 하플로바가 사망하자 이듬해 여배우 다그마르 베크르노바와 결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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