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택의 펜화기행] 거창 정온 선생 고택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08면

조선시대 양반집에는 남편이 쓰는 사랑채와 부인이 쓰는 안채가 따로 있었습니다. 남녀가 평등한 격식인데 재산관리는 부인이 했다니 예나 지금이나 남자들은 폼만 좋았지 실속은 안방에 있었던 게지요. 남편의 공간인 사랑채는 높은 기단 위에 지어서 권위를 돋보이게 하고 오른쪽에 누마루 방을 내달아서 선비의 풍류를 상징했습니다.

경남 거창군 위천면의 정온 선생(1569 ~ 1641) 고택의 사랑채는 정면 6칸, 좌측면 2칸 반에 두 줄로 방을 들였고, 오른쪽에 1칸 반 크기의 누마루 방을 내달아 지은 큰 건물입니다. 둥근 기둥 위의 누마루 방은 전면과 좌우 삼면에 처마 아래로 다시 처마를 덧대고 눈썹지붕을 달아 한껏 멋을 부렸습니다. 비가 들이치지 못하게 하는 기능보다는 멋을 더 중요시했을 것입니다.

누마루 방의 좌우측 창은 네 짝 분합문으로 접어서 들어 올리게 했고 정면의 창은 좌우로 열게 돼 있어 창을 모두 열면 세면이 탁 트인 공간이 됩니다. 정면과 좌측 창은 삼등분해 아래 위에는 정자살로, 가운데는 완자살로 치장했습니다. 전국 사랑채 경연대회에 나가면 일등은 떼어놓은 당상일 것입니다. 굵은 홍송으로 정성 들여 지어 나뭇결이 곱습니다. 지붕 용마루 밑에도 작은 눈썹을 달았습니다.

영창대군의 처형을 반대한 충신 정온 선생이 병자호란 때 인조임금이 청에 항복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세운 집입니다. 정려문으로 충신가문임을 자랑하는데 14대 종부가 정갈하게 살림을 꾸려나가고 있습니다. 경주 최부잣집 맏딸로 까만 세단을 타고 신행을 올 때 거창고을이 떠들썩했답니다. 손님을 가리지 않고 후하게 대접한다는데 집안 전통 솜씨인 육포가 별미랍니다. 펜화가는 채식가여서 멀거니 보기만 했고 동행한 집사람만 혼자서 별미를 즐겼습니다.

김영택 한국펜화연구원장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