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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ver Story] '‘한국판 메릴린치' 꿈꿨는데…IB는 헛된 꿈이었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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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1면

월가의 ‘IB(투자은행)신화’는 무너지는 것일까.

세계 금융시장을 쥐락펴락해 온 리먼브러더스와 메릴린치가 넘어지면서 ‘IB 모델’에 의구심이 커지고 있다. IB들은 고객의 예금 없이 유가증권 투자로 막대한 돈을 벌어들여 다른 금융회사들에 선망의 대상이 돼 왔다. 특히 내년 2월로 예정된 자본시장통합법(자통법) 시행을 앞두고 국내 증권사와 은행들은 너나없이 ‘한국판 메릴린치’를 꿈꾸며 IB 전환을 준비해 왔다. 그러나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주택 담보대출) 투자 실패로 초대형 IB들이 맥없이 쓰러지면서 IB 모델에 대한 근본적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파생상품이 주범=“한국에선 아직 CDO(부채담보부증권)가 뭔지 몰라요. 세계 금융시장의 흐름과 동떨어져 있는 겁니다.”

2006년 12월 홍콩의 한 대형 빌딩. 우리은행의 홍콩법인 개소식에 참석한 홍콩 금융계 인사는 CDO가 가장 뜨고 있는 금융상품이라며 설명에 열을 올렸다. CDO는 서브프라임 같은 모기지 대출을 넣어 만든 신종 금융상품이다. 당시만 해도 한국 측 참석자 상당수에게 CDO는 생소한 용어였다. 그만큼 한국이 세계 금융의 변방이란 방증이기도 했다. 그로부터 반 년도 안 돼 서브프라임 모기지 폭탄이 터지기 시작했다. 이는 마침내 세계 경제의 중심지인 월가에서 5대 투자은행 중 두 곳을 쓰러뜨리는 상황으로까지 번졌다. 도대체 어디에서부터 꼬인 것일까.

금융회사는 크게 상업은행과 IB로 나뉜다. 두 종류의 은행은 비즈니스 모델에서 큰 차이가 난다. 상업은행은 예금을 받아 대출해서 돈을 번다. IB는 유가증권을 인수하거나 중개해 수수료를 받는다. 인수합병(M&A) 등 기업 구조조정 과정에서 자문에 응하거나 대행해 주고 돈을 벌기도 하지만 IB들의 주 수입원은 유가증권 분야다. 자신들의 투자로 수익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최근 수년간 IB들이 주력한 것은 유가증권 파생상품이다. 리먼이나 메릴린치가 물린 서브프라임 모기지 투자도 이 분야에 속한다. 이런 파생상품이 커질 수 있었던 것은 대출이나 부채를 자산으로 삼아 새로운 신용을 만들어내는 고도의 금융기법 때문이었다. 미국의 오랜 저금리도 이를 가능케 했다. 낮은 금리로 돈을 빌려 이를 지렛대 삼아 몇 배, 몇십 배의 투자가 가능했던 것이다. 예컨대 대출상품을 자산으로 삼아 새로운 증권을 발행하고, 이렇게 모은 돈으로 새로운 대출을 해주고 그 대출을 바탕으로 또 다른 증권을 발행하는 식이다.

◆누구도 모른 위험=문제는 컴퓨터를 동원한 첨단 파생상품 구조가 너무 복잡해 감독당국조차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런 파생상품의 규모가 전 세계적으로 50조 달러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워싱턴 포스트는 15일 “50조 달러에 달하는 파생시장이 애매모호하게 만들어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등 금융감독기관들이 충분한 정보를 갖는 데 어려움을 겪어왔다”고 진단했다. 시장은 천문학적으로 부풀어 올랐는데 감독당국은 적절한 정보가 없었던 셈이다. 이런 파생상품엔 치명적인 결함이 있다. 최초 대출자가 돈을 갚지 못하는 상황이 오면 연쇄적으로 지급 불능 상태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서브프라임 시한폭탄도 주택담보 대출자들이 빚을 연체하면서 가동되기 시작했다.

‘고수익’만을 좇는 IB의 문화도 문제다. 돈이 되는 곳에 올인하는 분위기가 강하다. 리먼은 특히 그런 성향이 강했다. 모험과 도전을 즐겼다. 리먼이 JP모건·모건스탠리에 대한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서브프라임 관련 투자에 치중한 것도 그 때문이다. 그 결과 3분기에만 39억 달러의 적자를 기록했다.


높은 수익을 추구하면서도 정작 책임은 지지 않는 IB들의 내부 문화도 문제다. IB는 많은 수익을 거둔 직원들에게 수익의 일부를 나눠주면서 독려하지만 손실이 났다고 직원에게 손실 부담을 지우지 않는다. 직원들은 그만두면 그뿐이다.

◆“정답은 리스크 관리”=이번 사태는 국내 금융계에도 큰 충격이다. 전민규 한국투자증권 수석이코노미스트는 “우리가 선망했던 IB들의 리스크 관리가 이토록 허술했다니 허망할 따름”이라고 말했다. 이철휘 한국자산관리공사(KAMCO) 사장은 “금융엔 왕도가 없다는 것이 이번 사태를 통해 분명히 드러났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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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전문가들 사이에선 IB 모델을 지향해 온 국내 금융계의 진로 설정이 잘못된 것은 아니라는 의견이 많다. 김형태 한국증권연구원장은 “IB 모델 자체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리스크 관리와 건전성 규제를 철저히 하지 못했던 게 문제”라면서 “이번 사태가 IB를 지향하는 국내 금융계와 감독기관에 큰 경종이 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철휘 사장은 “이럴 때일수록 금융회사의 체질을 강화하고 건전성을 높이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상렬·김영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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