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책갈피] 일 제국주의·황국사관 전파 … 도쿄대 교수들이 ‘선봉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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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일왕과 도쿄대는 현대 일본을 형성한 두 개의 중심축이다. 위 사진은 도쿄대 정문. 아래 사진은 메이지 일왕(右)과 맥아더와 함께 선 쇼와 일왕이다. [중앙포토, 청어람미디어 제공]

천황과 도쿄대 1,2
다치바나 다카시 지음, 이규원 옮김, 청어람미디어
각 권 1160·1128쪽, 각 4만3000원

 일본을 제대로 알고자 한다면 반드시 읽어야 할 역사 논픽션이다. 오늘날에도 세를 잃지 않은 일본 우익의 뿌리를 파악하고, 극동의 외진 곳에 자리잡은 후진국이 패권을 다투는 제국주의 열강으로 올라서게 된 저력의 비밀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일본 양심의 편린을 만나는 것은 덤이라 할까.

다루는 시기는 메이지 유신 초기에서 1945년까지. 지은이는 이 시기에 일본을 움직인 것은 일왕과 도쿄대(東京大)라 보았다. 한때 현인신(現人神)으로까지 숭앙받던 일왕이 국가의 상징으로 방향을 제시했다면, 도쿄대는 인재를 길러내 국가경영을 이끌었다고 판단한 것이다. 대학의 역할, 군부 전횡, 지성인들의 곡학아세, 제국주의와 민주주의의 갈등이 숨가쁘게 펼쳐진다. 때문에 정치사로도, 지성사로도 읽힌다. 2300쪽이란 방대한 분량이지만 지레 겁먹을 필요는 없다. 다양한 인물들이 생생하게 묘사된 덕분에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는 아니지만 그야말로 술술 읽힌다. 대신 읽는 이의 관점에 따라 다양하게 얻을 수 있다.

우선 일본의 우익은 어제오늘 생겨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오늘날에는 침략주의, 영토 확장주의, 적국 박멸책 등이 모두 필요하며 이를 행하지 않으면 조상에 불효하는 것이고 황실에 불충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1903년 도쿄제대 법학부 도미즈 히론도 교수가 언론에 기고한 글이다. 그는 이를 근거로 “참으로 작은 나라인데 막 망해가는” 조선을 일본의 일부분으로 거두어 주고 싶으며 조선을 방어하기 위해 만주를 취하고 러시아와 전쟁을 벌여야 한다고 공개 강연을 한다.

도미즈를 비롯한 제국대학 법과대학 교수들이 국민국가 형성 초기 일본 제국주의 확장에 길라잡이 역할을 했다면 전쟁 말기 가미카제 등 자살특공대, 옥쇄작전의 정신적 바탕을 마련한 이는 국사학과의 히라이즈미 기요시 교수였다. 그는 일왕이 한 핏줄로 이어져 온 일본은 신국(神國)이라는 황국사관을 신봉하며 그 대중화에 앞장섰다. 특히 육군사관학교 강연 등을 통해 젊은 장병들이 죽을 줄 알면서도 “천황 폐하 만세”를 외치며 사지로 뛰어들도록 정신무장을 시켰다고 지적한다.

물론 지성인들이 모두 이들과 같았던 것은 아니다. “천황군(君)이 당신을 죽이러 오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등 자유로운 발언을 일삼던 교토제대 다키가와 유키토키 교수를 정부가 해임하려 하자 교수 39명이 학문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동조사표를 내기도 했다. 그리고 그런 ‘양심’은 일본을 지탱하고 전후 부흥을 일군 버팀목이 됐다. 도쿄대학 명예교수를 지낸 호소야 노리마사의 증언을 보면 그런 저력을 느낄 수 있다. 그는 1945년 8월 15일 대학 강당 옆에서 일왕의 ‘종전 선언’을 들었다. 그런데 일왕의 방송 후 정상 수업을 했단다.

일본 저력의 바탕은 그 뿐만이 아니다. 마르크스주의자라고 쫓겨났던 도쿄대 경제학부 교수 오우치 효에는 종전이 임박한 1945년 4월 일본은행 총재의 부탁으로 전후 인플레이션에 대비한 연구를 시작했다. 또 역시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였던 아리사와 히로미 조교수는 석탄과 철강 생산에 주력해 경제성장을 꾀하자는 ‘경사생산방식’을 제안해 경제부흥의 디딤돌을 마련했다.

이 같은 움직임을 살펴보노라면 그리 개운하지 않다. 일본에서 ‘지(知)의 거장’으로 불리는 지은이가 “당시는 소수 우익 국수주의자가 있었던 게 아니라 모두가 천황숭배자였다”며 ‘일억 총참회’란 말로 책임규명을 피해갔다는 ‘양심 선언’을 해도 그렇다. 독도문제 등에서 보듯 일본의 국수주의는 갈수록 세를 더하고 그들의 ‘힘’은 여전하기 때문이다.

김성희<고려대 초빙교수·언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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