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220조 투입’도야코 충격에 정책비전 대전환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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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호 20면

7월 9일 일본 홋카이도 도야코에서 열린 G8 확대정상회의. 미국·영국 등 서방 선진 7개국과 옵서버로 참석한 브라질·인도·중국 등 15개국 정상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명박 대통령이 발언대에 섰다.
“나는 ‘얼리 버드(early bird)’라는 평을 듣고 있는데, 보좌관들이 힘들다고 불평한다. 기후 변화와 에너지 분야에서만큼은 한국이 국제 사회에서 ‘얼리 무버(early mover)’가 되는 데 주저하지 않을 것입니다.”

MB ‘녹색성장’ 리더십 나오기까지

이 대통령이 온실가스 감축에 강한 의지를 나타내자 각국 정상은 큰 박수를 보냈다. G8 회의를 마치고 귀국한 대통령은 청와대 비서진에 녹색성장 대책을 마련할 것을 지시했다. 김상협 청와대 미래비전비서관은 “대통령이 비서관 회의 등에서 ‘더 이상 늦추면 낙오한다’며 강도 높은 주문을 했다”고 전했다.

대체 G8 회의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청와대 인사들은 “각국 정상과 양자회담과 다자 간 회의를 하면서 저이산화탄소 문제가 당장 눈앞에 다가온 현안이란 사실을 실감하게 된 것”이라고 말한다. 특히 영국이 2020년까지 220조원에 달하는 막대한 예산을 신재생에너지 분야에 쏟아 붓는 계획을 발표하는 등 선진국 정상들이 앞다퉈 ‘저이산화탄소 강국’으로의 도약 의지를 보인 것이 대통령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김 비서관은 “당시 회의에서 브라질의 룰라 대통령까지 기후 변화 문제에 목소리를 높였다”고 했다.

지난 2월 취임사에서 구체적으로 명시되지 않았던 녹색성장 비전이 6개월 뒤인 8·15 경축사에 포함된 결정적 계기는 G8 정상회의였다는 것이다. “대운하 공약이 물거품이 된 뒤 알맹이 없이 급조된 선언일 뿐”이라는 비판에 대해 김 비서관은 “이미 2월 말에 ‘기후 변화 문제를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꼼꼼하게 챙겨라’는 대통령 지시가 있었다”고 강조했다. “그동안 정부 각 부처, 학계와 산업계 전문가들과 꾸준히 협의해 준비해 온 사안”이란 얘기다.

이 대통령은 7월 말 4박5일간의 휴가에 들어가서도 8·15 경축사에 담길 내용을 꼼꼼히 챙겼다고 한다. 김 비서관은 “이 대통령은 휴가지에서 녹색성장에 대한 좀 더 강력한 의지가 연설문에 반영되도록 하라는 추가 지시를 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국가 미래비전 제시를 앞두고 참모들 사이에 논란이 적지 않았다. 비서진 회의에서 “너무 장기적인 프로젝트 아니냐”는 지적이 나왔다. “지금 당장 경제 살리는 것이 더 중요한데 (녹색성장은) 좀 늦게 가면 안 되느냐”는 현실론도 등장했다. 하지만 대통령의 의지는 강했다.

“기업은 이미 신재생에너지 등 녹색성장 관련 분야를 발 빠르게 준비하는데 정작 국정을 운영하는 공직자들이 그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 녹색성장은 한국만의 고유 브랜드가 아닌 글로벌 키워드며 ‘기래(旣來·이미 도래한)’한 이슈다.”대통령의 질책과 비서진 토론을 거치면서 공감대가 형성돼 갔다. 신재생에너지 분야에 대한 투자와 기술개발이 과감하고 신속하게 이뤄져야 한다는 쪽으로 ‘8·15 녹색성장 선언’의 초점이 맞춰졌다. ‘녹색성장’이라는 정리된 개념으로 이 대통령에게 미래 비전을 보고한 이는 김상협 비서관이었다. 김 비서관은 “저이산화탄소 녹색성장은 한국의 고유 브랜드가 아니다. 이미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말로 작게는 산업구조를 바꾸는 것이지만 크게는 인간의 생활 환경을 바꾸고, 한 국가의 캐릭터와 문명을 바꾸는 어젠다라는 판단을 했다”고 말했다.

그는 또 “8·15 경축사에 이러한 선언이 들어간 것이 뜬금없는 것 아니냐”는 일부의 비판과 관련해 “건국 60주년이 된 올해는 다음 세대를 새롭게 준비한다는 의미가 있는 만큼 향후 대한민국이 가져가야 할 비전을 선포한다는 뜻에서 이날 발표하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 비서관은 “환경보호만을 외치는 ‘녹색’과 달리 일자리 확대는 물론 신성장동력의 핵심 축으로 만들겠다는 것”이라며 “그린테크놀로지 분야는 선진국과 5~10년의 기술 격차가 있지만 정보기술(IT) 등과 결합해 적극적인 투자가 이뤄지면 격차를 빠르게 줄일 수 있다”고 했다.이 대통령의 8·15 선언이 급조된 것인지, 아니면 충분히 준비된 것인지는 실제 우리 경제의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떠오를지, 그 현실화 여부에 달려 있다.

‘녹색성장’ 청사진은
정부는 8월 27일 이명박 대통령 주재로 국가에너지위원회를 열고 ‘제1차 국가에너지 기본계획(2008~2030)’을 확정했다. 이에 따라 고유가 시대를 대비하고 급격하게 팽창 중인 신재생에너지 분야를 국가의 새 성장동력을 삼겠다는 ‘저이산화탄소 녹색성장’의 청사진이 실행에 옮겨지기 시작했다.

우선 정부는 현재 83%에 달하는 화석 에너지 비중을 2030년까지 60% 수준으로 낮추고 신재생에너지와 원자력 발전 비중을 크게 높이는 작업에 착수했다. 특히 정부는 신재생에너지 보급 비중을 현재 2.4%에서 2030년까지 11%로 늘리기로 했는데, 태양광 부문은 지금보다 44배, 풍력은 37배, 바이오는 19배, 지열은 51배 등으로 확대할 것으로 보인다. 원자력 발전 비중은 현재 36%에서 59%까지 늘릴 계획이다. 이를 위해 신고리 3, 4호기급(140만㎾급) 기준으로 10기 정도의 원전을 새로 건설한다.

신재생에너지 비중 확대를 위해 총 111조5000억원을 투입한다. 이중 35조2000억원을 정부가 투자하고 나머지 76조3000억원은 민간 투자를 이끌어낸다는 구상이다. 지식경제부 에너지자원정책과 이민우 사무관은 “2003년 이후 매년 35%씩 증가하고 있는 신재생에너지 분야의 지원자금을 보다 확대하면 이 분야 R&D를 위한 시드 머니(종자돈)를 형성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는 특히 차세대 박막 태양전지와 대형 풍력발전기기 국산화 등 핵심 원천기술 개발을 지원해 국산개발 제품의 초기 시장 창출을 유도하기로 했다.

아울러 ‘그린홈(Green Home) 100만 호 공급사업’ 등을 통해 시장을 창출하고 ‘녹색에너지산업추진위원회’를 두어 민관 간 의견조율의 장을 만들 계획이다. 정부는 국가에너지기본계획 시행에 따라 2030년까지 신재생에너지 분야에서 95만 명의 신규 고용이 창출되고 신재생에너지 분야의 세계시장 점유율도 현재 0.7% 수준에서 2030년 15% 이상으로 늘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국가에너지기본계획은 녹색성장의 기반을 튼튼히 하기 위해 에너지 저소비 사회 구현과 에너지 안보 강화 대책도 포함한다. 2030년까지 에너지 소비 연평균 증가율을 1.1% 수준으로 낮춰 에너지 사용 효율을 46%가량 개선하고, 4.2%에 불과한 해외 석유·가스 등의 자주 개발 비율을 40% 수준으로 높일 계획이다.

지식경제부 에너지자원정책과 김권성 서기관은 “국가에너지기본계획은 향후 발표될 기후변화 대응 종합계획(9월), 신재생에너지 기본계획(9월), 그린에너지 기본계획(9월), 에너지이용 합리화계획(11월), 전력수급기본계획(12월) 등을 통해 구체화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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