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지리기행>25.제주 곽지리의 자생풍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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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지금 우리나라에서 풍수의 교과서처럼 취급되고 있는 책은 4세기중국 동진(東晋)시대 곽박(郭璞)이 저술한 것으로 알려진 장서(葬書)다.금낭경(錦囊經) 혹은 장경(葬經)이라 불리기도 하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풍수 최고서(最古書)인 청오경 (靑烏經)이장경이고 금낭경이 장서라 불리는 것이 일반적인 중국의 관례다.
어찌 되었거나 풍수의 정의는 곽박의 금낭경을 따르는 것이 가장흔한 일인데 그에 이르기를 『기는 바람을 타면 흩어지고 물에 닿으면 머무른다.그래서 옛 사람은 기를 모아 흩어지지 않게 하고 기가 돌아다니다가 멈추게 하고자 했으니 그래서 풍수라 하게되었다(經曰,氣는 乘風則散이오 界水則止니 古人은 聚之使不散하고行之使有止하나니 故로 謂之風水라)』는 것이다.말하자면 바람에 품긴 생기(生氣)를 갈무리하고 물에 의해 생기를 머물러 있도록하자는 뜻에서 풍수라 했다는 말이다.즉 물과 바람은 풍수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는 셈이다.
하지만 이는 중국 풍수의 정의다.우리의 자생풍수도 마찬가지일까.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94년 10월21일 제주도북제주군애월읍곽지리에서 만난 현지 정시(제주에서는 지관을 정시라 함)박인선(朴仁善.당시 86세)옹은 전혀 다른 풍수의 정의를 갖고 있었다.금년 4월 다시 제주도에 들어갔을 때 곽지마을을 또 들어갔으나 그분 을 만날 수없었다.그러나 그분의 풍수 정의는 한국 자생풍수의 특성을 드러내고 있는 듯해 매우 귀중한 증언이 될 듯싶어 정리해 둔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곽지리에 대한 지리적 개념이 필요하리라. 곽지리는 전체적으로 북서쪽으로 바다를 향하고 있는 마을이라바람이 세다.또 동쪽은 과오름에 의해 중산간지대와 어느 정도 격절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 정도가 미약한 편이다.마을 뒤쪽으로는 너분밭이라는 들이 펼쳐져 있는데 폭이 좀 좁은 편이다.그런데 그 들을 둘러싸고 있는 둔덕에 구멍(현지에서는 오도롱꼬망.
궤 또는 구목이라고도 하며 일종의 반 동굴 형태임)이 있는 것이 문제다.
박인선옹의 얘기는 이렇다.
『꼬망은 한라산에 큰 비가 내렸을 때 홍수가 중산간지대를 지나 이곳을 지나가면서 뚫렸다.그리고는 그대로 마을을 덮쳐 폐허를 만든 것이다.그 뒤에 그 꼬망으로 물도 지나가고 바람도 따라와 불었다.물과 바람(風水)이 휩쓸고 지나간 땅 에는 곡식도되지 않고 봄철에 눈도 잘 녹지 않았다.그 땅은 죽은 땅이다.
』 그러면서 예의 그 자생풍수 정의가 나왔는데,이르기를 『물과바람은 땅을 죽인다.따라서 그 물과 바람은 피해야 할 어떤 것이다.풍수란 바로 그 물과 바람을 피하는 조상들의 지혜』라는 얘기였다.
너무나 당연한 얘기지만,그리고 일반인들에게는 이 정의가 왜 그렇게 중요한 것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겠지만 이 분야 전공자인 내게는 청천의 벽력과 같은 타격을 주는 내용이었다.왜냐하면당시 나는 자생풍수의 흔적들을 찾기 위해 제주도 와 서남해안및섬지방, 그리고 산골 오지마을을 답사하고 있던 중이었으니까.
이미 소개한 바 있는 영암 도감리의 자지골.보지골이란 곳도 그렇고 삼척 골말의 좆대바위란 것도 그때 자생풍수의 한 흔적으로서 조사된 것이었다.
이 세상에는 모모(某某)하는 양반마을(班村)의 풍수가 대단한것처럼 알려져 있지만 기실 그 지세를 면밀히 검토해보고 그 마을 사람들의 삶에 대해 소문을 들어보면 결코 그런 곳들이 우리풍토에 잘 맞는 터잡기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지면이 학문의 장이 아니기에 길게 설명할 수는 없으나 나는 중국 풍수가 자생풍수를 궤멸시키고 이 땅을 석권한 것은 대체로조선 성종대 이후부터라고 본다.
반촌들은 모두 그 이후에 생긴 것들이다.따라서 그 마을 입지는 자생풍수가 아니라 중국의 이론풍수에 입각해 이루어진 것이므로 제대로 자리를 잡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중국 풍수는 이론이 체계화돼 수입된 것이기 때문에 그 논리만잘 받아들이면 현장 적용에 별 어려움이 없다는 장점이 있다.하지만 풍토가 다른 곳에서 만들어진 땅의 이치(地理)인데다 그것마저도 음양론.오행론.주역적 사고등에 꿰맞춰 놓 은 것이라 다양한 풍토의 우리 땅에는 맞지 않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반면 우리 자생풍수는 마을마다 또는 지방마다 그 풍토에 맞게지리적 경험과 지혜를 축적하다 보니 양호한 풍토 적응성이라는 장점이 있는 반면 이론화나 체계화를 할 수 없다는 결정적 단점이 있다.
게다가 조선시대 양반들이 주로 술법위주의 중국 풍수를 들여와유포시키는 바람에 자생풍수는 거의 자취를 감추게 된 것이고 그러다 보니 박인선옹과 같은 자생풍수사의 얘기가 마른 하늘의 날벼락같이 들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제 우리 자생풍수의 특성상 이를 비보(裨補)하지 않았을 까닭이 없다.당연히 곽지리에도 비보가 있다.아니 있었다.얘기가 좀 달라지는데,이 마을에 언청이가 많았는데 한 스님이 오도롱꼬망이 사각(死角)을 비추는 동굴이니 보허(補虛)하 라고 지시를해서 꼬망옆 도도록한 바위 위에 거욱대를 세웠다.요사스런 기운을 막자는 일종의 방사탑(防邪塔)으로 비자나무나 참나무와 같은단단한 나무로 만들었다고 하지만 이 역시 새마을운동이 없애버렸고 그것을 기억하고 있는 마을 사람 도 드물었다.
다만 거욱대를 세웠던 터의 기단부만 잡초에 가려 있을 뿐이다. 그리고 동굴 앞에는 수령 2백년쯤 된 소나무가 한그루 심어져 있다.이 또한 비보 기능을 수행하는 나무다.거욱대는 제주의거센 바람과 물을 주의하라는 깃발의 역할을 했고 소나무는 그 옆에 거느리고 있는 몇 그루 잡목들과 함께 갑자기 쏟아져내리는빗물을 잠시라도 막아주는 역할을 했을 것이다.
***박 옹은 이런 얘기도 했다.북쪽 자방(子方)바닷가에는 왕석(王石)이라 불리는 3층석탑이 있는데 모양이 문필봉(文筆峰)이라 제주도에서는 곽지리밖엔 학자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었으나 이는 물론 과장이다.이곳에는 추사 김정희가 유배생활을 했 던 터가 있다.아마 그것을 회상하는 말씀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금년 답사에서도 그 왕석을 찾아내지 못했다. 왕석을 찾아 헤매던 곽지리 바닷가 가까이에는 비취빛의 티없이 맑은 물,멀리는 심연처럼 두려움을 주는 검푸른 해수,분가루처럼 고운 모래밭에 털썩 주저앉아 담배를 문다.
왈칵 이유를 알 수 없는 그리움이 서러움처럼 가슴을 메운다.
그리움은 서러움이다.
(풍수지리연구가.전서울대교수) 최창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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