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대륙은 정화가 먼저 밟았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5면

1488년 희망봉을 돌았던 모험가 디아스, 그 4년 뒤인 1492년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 초등학교 시절 귀 아프게 들어온 이름들이지만, 그보다 거의 100년 앞섰던 중국 명나라의 해양왕 정화(鄭和)는 고교 세계사 책에 단 한 줄 이름만 비친다. 그가 이끌었던 배가 길이 150m짜리 초대형 정크선으로 콜럼버스 배의 12배였다는 사실도 미처 소개되지 않는다.

이렇게 균형을 잃어온 세계사의 일방적인 '최초' 기록들을 갈아치우는 도발적인 책이 독서시장에 선보였다. 신간 '1421 중국, 세계를 발견하다'(개빈 멘지스 지음, 사계절)가 그것으로, 이 책은 서너 걸음을 더 내디딘다. 즉 정화는 콜럼버스에 71년 앞서 아메리카를 발견했다는 것, 따라서 마젤란 세계 일주를 앞서 지구촌 바닷길을 열었다는 것이다. 영락제의 지시에 따른 7차례 원정에서 태평양을 오가며 남북 아메리카는 물론 남극.호주까지 원정했다는 주장이다.

저자는 영국 해군 잠수함 함장 출신. 퇴역장교인 그는 아마추어 학자가 아니다. 지난해 3월 영국 왕립지리학회에서 위와 같은 주장을 발표했다. 이어 출간된 이 책은 아마존 베스트셀러에 올라섰다. 15세기 당시 고지도에 밝고 무려 14년간의 탐사 끝에 나온 학설이기 때문에 국제학계는 지금 당혹스러워 하고 있다.

▶ 중국 명나라의 정화가 이끈 길이 150m의 대형 정크선(사진위)과 그 배 크기의 10분의 1이 채 안되는 콜럼버스의 배 ‘산타마리아’호.

당혹감은 이 책이 주장하는 개별 사안 때문이 아니다. 지난 10여년간 유럽과 미국학계에서 서구 중심주의의 역사서술에 대한 반성이 수정주의라는 큰 흐름으로 진행되고 있는 과정 때문이다. 유럽중심주의에 대한 총체적인 반성 속에 유럽연합(EU) 출범 전후에 나온 '거울에 비친 유럽'(조셉 폰타나 지음, 새물결, 1999) 등은 예전 세계사 책의 일방주의와는 한참 거리가 멀다.

국내만 해도 양질의 읽을거리로 '콜럼버스가 서쪽으로 간 까닭은?'(이성형 지음, 까치), '리오리엔트'(안드레 프랑크 지음, 이산), '유라시아 천년을 가다'(최갑수 등 지음, 사계절) 등이 지난 1~2년새 잇따라 선보였다. '리오리엔트'의 경우 18세기 이전에 글로벌 경제가 활기차게 움직이고 있었다는 것, 그 핵심은 중국을 포함한 아시아라고 주장한다. 서구 모더니티 자체에 대한 도전장인 셈이다.

'1421 중국, 세계를 발견하다'에서 놀라운 것은 콜럼버스 등 유럽 탐험가들이 거의 예외없이 정화가 제작한 세계지도를 보며 항해를 했다는 실증적인 주장이다. 중국은 항해술과 배 건조술 모두에서 유럽을 압도했다는 것이다. 한국 독자들로서는 조선시대 권근이 제작한 '강리도(疆里圖)'가 이 책에 등장하는 점에 놀랄 수도 있다. '강리도' 역시 정화가 만든 지도를 토대로 제작했다.

저자는 15세기 초반 아메리카의 풍물과 생물 등에 대한 정보를 담은 '이역도지(異域圖志)'(1430년) 등 문헌적 증거와 함께 마야인들이 유럽의 닭과 다른 중국 닭을 오래전부터 키우고 있다는 생물학적 증거들도 들이대고 있다.

조우석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