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품 인삼주 빚은 경영학 박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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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술 한 잔을 받아들었다. 노르스름한 빛을 띠는 투명한 술. 첫 맛은 약주처럼 쌉쌀한가 싶더니, 목을 넘기자 혀끝에 달콤하고 은은한 인삼향이 감돌았다.

대낮부터 술잔을 건넨 이는 중앙대 경영학과 정헌배(53) 교수. 1999년부터 ‘명도와 주도’를 강의하고 있고, 경기도 안성에 있는 한국전통주연구소를 설립해 운영하고 있는 ‘술 박사’다. 그가 최근 자신의 이름을 딴 ‘정헌배 인삼주’를 내놨다. 경영학과 교수와 술. 통하는 구석이 당최 없어 보이는 조합인데…. 술 제조시설과 지하 저장고를 갖춘 전통주연구소에서 그를 만났다.

“제가 젊었을 때, 그러니까 70년대는 수출시대였잖아요. 경영학도니까 자연스레 수출 가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하다가 술이 좋겠더라고요. 술은 부가가치가 높아요. 외국에는 한 병에 수백만원 하는 술도 많으니, 우리도 잘 만들어 수출하면 되겠다고 생각했죠.”

외국 서적 들추며 혼자 ‘술 공부’에 빠져들었다. 주도 수업 아이디어도 이때 떠오른 것이다.


“덜 취한다는 약 마시고 술 마시러 가는 나라가 세상에 한국 말고 어디 있습니까. 외국에선 ‘음주에도 책임이 따른다’고 책에서 가르치더라고요.”

80년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다. 남들은 미국으로 경영학 공부를 떠날 때 ‘술의 나라’에서 주류마케팅을 공부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85년 귀국해 중앙대 강단에 섰다. 부지런히 주류 마케팅에 대한 논문을 썼고, 주세나 주류 규제 관련 위원회 활동도 했다.

“술은 각 분야랑 연결이 돼 있어요. 세금·규제·청소년 문제까지요. 그런데 우리나라엔 발효공학 연구자는 많지만 주류산업 연구자는 드물어요. 그러니 제가 계속 관련 활동을 하게 됐고, 주류업체와도 일할 기회도 많았죠.”

이 때부터 업계 관계자들을 만나면 입이 닳도록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우리도 100년 뒤 후손에게 남길 술을 만들자고.

“그런데 주류 대기업들이 안 해요. 소주·맥주 팔아 번 돈을 우리 술에 투자하면 좋을 텐데 안 하더라고요.”

90년대 말 민간의 주류 제조가 가능해지면서 전통주가 부활하나 기대했지만 영세업자들이 만든 술은 품질이 문제였다.

“표준화가 안 돼 있으니까 만들 때마다 술이 달라요. 알콜 도수는 제각각이고 위생 관리도 안 되고…”

결국 그가 팔을 걷었다. 세계 시장에서 효능을 인정받은 인삼으로 술을 빚기로 했다. 제조기술자를 모았고 연구를 시작했다. 시중에 나와있는 각종 인삼주를 시음했다. 기존의 인삼주는 대부분 인삼을 소주에 담근 것으로, 맛이 떨어지고 전통주라고 할 수도 없는 수준이었다. 발효·증류·숙성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일단 인삼조합의 협조를 받아 한날, 한시에 전국 산지에서 인삼을 2㎏씩 캤고, 두산에 ‘술밥’ 을 지어달라 부탁해 인삼주를 빚었다.

“풍기인삼·금산인삼·강화인삼 따라 술 맛이 모두 달라요. 인삼주는 한 가지라고 생각하는 분이 많겠지만, 전국 인삼이 어떻게 똑같습니까. 포도 품종 따라 와인 맛 다른 거랑 같은 논리에요.”

2004년 본격적으로 농업회사법인을 세우고 5년 가까이 공들인 끝에 지난달 말 주문을 받기 시작했다. 우리 쌀과 6년근 수삼으로 담근 술을 옹기에 담아 저장고에서 3년을 익힌다. 첨가제 없이 원료 고유의 맛을 내는 명주를 빚기 위해 누가 쌀을 짓고, 인삼을 경작했는지 실명을 기록했다. 그의 술이 9L들이 한 독에 88만원이나 하는 이유다.

“비싸도 한우를 먹는 것처럼 우리 재료로 만든 술도 가치가 있어요.”

정 교수는 지난해 프랑스의 와인제조업자들에게 인삼주를 시음하게 했다. 과실주에 익숙한 이들이라 쌀로 빚은 술이 낯설 텐데도 반응이 좋았단다. 세계시장에서 우리 술의 가능성을 점칠 수 있는 대목이다.

“최근 와인 열풍이 불면서 전통주에 대한 관심이 확 줄었어요. 술맛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술에 이야기가 없기 때문이에요. 와인은 만화도, 영화도 있잖아요. 술은 맛으로만 마시는 게 아니거든요. 분위기를, 이미지를 마시는 거에요. 우리도 전통주와 한식의 ‘마리아주(궁합)’를 고민하고 이벤트를 만들어야죠.”

그는 한국의 인삼주도 프랑스의 코냑, 스코틀랜드의 위스키 같은 명품 술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런 그가 고대하는 것이 있다. 우리도 ‘몇 년도 산 빈티지 인삼주’를 갖는 것이다.

“올해는 2000독, 내년엔 6000독을 만들 계획인데, 한 해에 1만 독 이상은 못 만들어요. 혼자 하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제가 시작을 했으니 다른 분들이 대중화에 힘을 보태주길 바라고 있습니다.”

글·사진=홍주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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