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계 高手 끝장토론으로 갈등 풀어낸 100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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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호 20면

① 스톡홀름의 의회에 모인 의원들. 스웨덴은 타협적인 ‘정당 시스템’과 ‘입법 체계’로 사회적 갈등을 예방해 번영을 일궜다.

갈등 씨를 말린다
같은 날 스톡홀름 구시가지의 릭스닥(Riksdag). 의회를 이렇게 부른다. 이곳의 남쪽 건물 도서관엔 스웨덴의 ‘백년 갈등’을 다스린 비밀이 숨어 있었다. 의회 도서관에 빼곡한 ‘국가조사위원회 보고서(SOU)’가 그 치료약이었다. 20년간 스웨덴에서 생활한 남스톡홀름대 최연혁(정치학) 교수는 “SOU 시스템으로 법이 탄생하면 아무도 딴죽을 못 건다”며 “갈등의 씨를 원천봉쇄하는 제도”라고 말했다.

경쟁력 우등생 북유럽을 가다

②핀란드 스톡만 백화점 앞의 대장장이 동상. 협동의 정신을 상징한다. ③ 세계 1위 휴대전화 회사인 핀란드의 노키아는 ‘사람을 연결한다(connecting people)’를 모토로 삼는다. 이런 철학으로 협력업체 및 고객과 소통해 경쟁력을 키웠다. 스톡홀름·헬싱키=신동연 기자, AFP특약

대체 SOU가 뭐기에 이런 저력을 발휘할까. 사회적 갈등을 일으킬 골칫거리가 터질 때 스웨덴 사람들은 과연 어떻게 풀어 나가는지를 살펴보자. 정부는 맘대로 법을 만들지 못한다. 먼저 ‘특별위원회’를 꾸려야 한다. 여기엔 ‘네 편 내 편’을 떠나 정당·학계·시민단체 고수들이 망라된다. 갈등 해결의 열쇠를 찾을 일종의 ‘배심원’ 조직인 셈이다. 이러니 ‘밀어붙이기’식 결론은 나올 수 없다. 둘째, 레미스(Remiss)라는 조사로 민초 여론까지 흡수하며 끝장 토론을 벌여 합의를 도출해 낸다. 셋째, 결론이 의회에 제출되면 큰 문구를 건드리지 않고 법안으로 통과된다. 스웨덴인은 SOU를 거치면 ‘누구나 수용한다’는 자랑스러운 전통을 만들었고, 이를 꿋꿋이 실천하고 있다.최 교수는 “법안을 만들 때는 100년 넘게 축적된 SOU 관련 보고서부터 참고한다. 웬만한 사안은 다 포괄한다”며 “한국에선 갈등 소지가 있는 법을 놓고 정당들이 주판알만 튕길 때가 많지 않으냐”고 반문했다. 실제로 SOU는 크고 작은 정책부터 개헌까지 다룬다. 의회 정보부의 미카엘 란덴은 “1년에 만들어지는 SOU만 50~150개에 이른다”고 했다.

최근엔 노동시장위원회라는 정부 조직을 없앨지 논란이 됐다. 사민당 정권에서 오랫동안 재취업교육·직업소개 등을 담당한 곳인데 2006년에 들어선 우익정부가 ‘제 역할을 못 한다’며 없애려 하자 반발이 셌다. 갈등 불씨가 붙자 결국 SOU의 손으로 넘어갔다. SOU는 덜컥 만들어진 게 아니다. 근대 헌법을 도입하면서 스웨덴 왕은 외무·법무장관에게 외치·내치 자문을 맡겼다. 물론 이들도 만물박사는 아니었고, 전문가를 찾아 모르거나 궁금한 걸 물으면서 19세기 말 부터 ‘협력·대화’를 근간으로 삼은 SOU의 뼈대가 잡혔다.

보통 스웨덴 모델을 말할 때 등장하는 유명한 ‘샬트슈바덴 노사정 협약’(1938년·노조는 임금인상 자제하고 기업은 경영권 보장받음)도 이렇게 일찍부터 ‘타협 유전자’를 갈고닦았기에 가능했다. 이런 전통이 90년대 초에 불어 닥친 금융위기를 극복하는 밑거름이 됐음은 말할 것도 없다. 사실 스웨덴 모델은 노무현 정부 때 ‘성장+복지’의 국가를 향한 나름의 해법으로 제시되기도 했지만, 그 작동원리의 비밀은 잘 소개되지 않았다.

탈코트 정신으로 세계 최강 경쟁력
몇 년 전부터 각종 조사에서 국가경쟁력 상위권으로 명성을 떨치는 핀란드도 비슷한 DNA를 갖고 있다. ‘워킹 그룹’이 대표적이다. 정부 내에 수백 개의 워킹그룹을 두고, 이슈를 매듭지을 때까지 끝장 토론을 한다. 교실이나 일상의 삶에서 ‘탈코트(Talkoot·협동)’를 달달 외고 사는 나라답다. 특히 한국의 쇠고기 수입 문제처럼 실생활과 밀접한 정책은 워킹그룹이 지혜를 모아 법 초안을 만드는데, 국회도 여기에는 토를 달지 않고 통과시킨다.

지난달 헬싱키에서 가장 번화한 스톡만 백화점 앞. 3명의 대장장이가 협동하며 일하는 동상 앞에 관광객들이 몰려 사진을 찍고 있었다. 도시 명물인 이 동상은 핀란드의 ‘화합 DNA’를 잘 드러내는 상징이었다. 이날 핀란드의 경쟁력 청사진을 듣기 위해 의회에서 만난 미래위원회 오스모 쿠시 박사가 꺼낸 화두도 비슷했다. “위원끼리 무엇보다 생각을 공유토록 유도하는 걸 중히 여긴다. 핀란드에선 가장 중요한 일이다. 세금처럼 견해가 천차만별인 사안도 있지만 토론해 맞춰 가려고 애쓴다.

당신 나라는 어떠냐.” 물론 한국이라고 못할 리 없다. 기자는 2년 전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놓고 한국개발연구원(KDI) 국제정책대학원 갈등조정협상센터의 박진 교수와 흥미로운 실험을 했다. 다양한 사고 스펙트럼을 가진 시민들을 배심원으로 뽑아 전문가들의 찬반 양론을 지켜보게 한 뒤 토론시켰다. 더 많은 정보가 공개되고 논쟁이 거듭되면서 처음과 달리 ‘FTA는 무죄’라는 방향으로 의견이 점차 수렴됐다. 꼭 국민성 문제는 아니라는 얘기다. 결국 갈등을 풀 제도적 장치가 없는 게 문제인 것이다.

‘갈등 조정 시스템’의 성공 사례는 얼마든지 더 있다. 80년대 말 국가 파산 상태에서 노사정 대통합과 개방·외자유치를 무기 삼아 ‘켈틱 호랑이’로 거듭난 아일랜드, 80년대 초 폴더(polder·간척지) 모델이라는 노사정 합의로 ‘유럽의 환자’ 오명을 벗은 네덜란드 등이 그렇다. 이들 나라도 모두 선진국 진입에 앞서 사회적 갈등과 경제 위기를 맞았지만, 결국 각계각층이 양보와 타협으로 해법을 찾아 신뢰를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

남미의 칠레도 마찬가지다. 연금 등 공공부문에서 이룬 눈부신 개혁의 뒷면엔 사회적 합의가 자리하고 있었다. 전 노동부 장관인 알바로 가르시아 후르타도는 “보건·연금·교육 등의 개혁은 모두 ‘사회적 동의’가 잉태한 것”이라며 “정계·재계·노동계 등 대표성을 띤 조직들이 축적한 합의의 역사가 이를 가능케 했다”고 말했다. 그는 “역사를 자랑하는 정당 정치가 갈등 예방의 밑거름이 됐다”며 “정부가 바뀌어도 정책이 유지되는 것도 이 때문”이라고 자랑했다. 반면 다른 남미 국가들처럼 선진국 문턱에서 갈등의 소용돌이를 극복하지 못한 사례도 얼마든지 있다.

‘사회적 자본’이 열쇠
상생의 유전자는 결국 ‘신뢰’에 뿌리를 둔다. 경쟁과 개방을 외치는 신(新)자유주의 물결 속에서 양극화가 심해지고 중산층이 얇아질수록 승자와 패자의 소통이 이뤄져야 신뢰가 쌓인다. 요즘 국제적 화두가 된 마이크로소프트 빌 게이츠 전 회장의 ‘창조적 자본주의’가 좋은 예다. 그는 기업이 톡톡 튀는 아이디어로 약자층·빈곤층에게도 접근하면 사회적 갈등이 줄고 회사는 더 큰돈을 번다는 상생적 개념을 내걸었다. 쉽게 말해 애덤 스미스의 경제적 이기심과 서로 돕는 양보·신뢰의 정신을 얼마든지 결합할 수 있고 이러면 갈등도 줄일 수 있다는 소리다.

미국은 북유럽 국가들과 달리 모든 것을 시장에 맡기는 정글 자본주의의 전통을 이어왔다. 하지만 가진 자들 안에서 게이츠나 워런 버핏 같은 이들이 솔선해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며 갈등을 예방해 나가지 않고는 경제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기대하기 힘들다는 공감대를 확산시키고 있다. 이른바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실천이다.

사실 스웨덴을 돌면서 궁금했던 건 대기업에 대한 국민의 생각이었다. 이 나라에도 대그룹이 있는데 발렌베리가 대표적이다. 제조업에서 은행까지 안 하는 게 없는 문어발 그룹으로, 국내총생산(GDP)의 30%를 차지하는 공룡 집단이다. 그런데 스웨덴 국민은 발렌베리 그룹을 자랑스러워했고, 여전히 경영권을 행사하고 있는 창업주 가문을 존경하고 있었다.

스웨덴투자청(ISA)의 마그누스 륀벡 조사국장은 “소속 기업들은 끊임없는 사회 공헌과 일자리 창출로 국민 경제에 기여하고, 창업주 가문도 사회적 통념과 도덕성을 거스르지 않는 가풍을 이어가기 위해 무진 애를 쓰고 있다”고 전했다.

물론 갈등이 없는 사회는 없다. 그건 죽은 사회나 다름없다. 다만 갈등의 해법이 있느냐가 중요하다. 그게 국가경쟁력을 좌우한다. KDI 우천식 박사는 “저성장 속 양극화로 경제적 이해관계뿐 아니라 정치적 이념과 가치관을 둘러싼 집단 갈등이 심해지고 있다”며 “국가경쟁력 잣대로 경제적 접근뿐 아니라 법·제도·질서 같은 사회적 자본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특별 취재팀
취재국=스웨덴·핀란드·영국, 미국·칠레·브라질, 인도
중앙SUNDAY=김광기·강남규·김준술·이상재 기자(글),
신동연·신인섭 기자(사진)
KDI=전홍택·서중해·고영선·우천식·조병구·김동률
연구위원, 공은주·이정미·서지영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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