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당에 양보만 하면 여당 제 역할 못 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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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 원 구성 협상이 결렬된 데 대해 이명박 대통령이 불편한 심기를 드러낸 것으로 전해졌다. 이 대통령은 지난달 31일 개원협상이 타결 직전까지 갔다가 막판에 결렬된 상황을 보고받는 자리에서 “계속 명분없이 야당에 양보만 하면 여당으로서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고 복수의 청와대 관계자들이 1일 전했다. 주변에선 “일방적으로 야당에 양보한 협상안에 대해 대통령이 불만을 드러낸 것”이란 말이 나온다.

한나라당 대야(對野) 협상 라인과 청와대 사이에 이상 기류가 감지되고 있다. 직접적 원인은 안병만(교육과학기술부)·장태평(농림수산식품부)·전재희(보건복지가족부) 장관 후보자에 대한 야당의 인사청문특위 구성 요구를 청와대가 거부해 협상이 결렬된 것으로 알려진 데 있다.

홍준표 원내대표는 전날 기자들에게 “정치적 해결도 가능하다고 봤으나 청와대가 수용하지 않았다”는 취지로 말했다. “의외의 암초”란 표현도 썼다. 청와대가 제동을 걸었다는 뉘앙스가 깔려 있다.

청와대는 “협상 실패의 책임을 청와대로 넘길 수 있느냐”는 불만을 나타냈다. 민주당은 “청와대가 이래라저래라 해선 안 된다”(정세균 대표)고 청와대를 공격했다. 한나라당은 뒤로 빠지고 청와대와 민주당이 직접 맞선 양상이다.

당초 청와대와 한나라당은 “인사청문특위는 안 된다”는 입장이었다. 국회법상 장관 후보자는 상임위에서 하도록 돼 있기 때문에 위법이라고 여긴 것이다. 지난달 30일로 청문 시한도 지났다. 청와대는 임시국회 마지막 날인 5일까지 청문 경과 보고서를 보내 달라고 국회에 요청해 놓은 상태다.

그러나 민주당이 협상장에서 인사청문특위를 제안하고 홍 원내대표 등 한나라당 협상 라인이 동조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협상 라인은 “사실상 다된 협상인데 인사청문특위 때문에 안 된다고 하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했다고 한다. 협의문 작성 단계에서 홍 원내대표가 청와대의 의사를 타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청와대 측은 “법에 어긋난 합의를 해놓고 수용하라는 말이냐”며 불쾌해했다. 한 청와대 인사는 “국회를 제때 개원, 제대로 된 청문회를 하겠다는 말을 믿고 이제껏 기다렸다”며 “국회가 할 일을 못해 (청와대가)법에 따른 (장관 임명) 절차를 밟겠다고 한 것인데 왜 우리에게 책임을 전가하느냐”고 불만을 표시했다. 당·청 간 갈등이 드러난 대목이다.

여권에선 청와대와 한나라당 협상 라인 간 갈등의 뿌리가 더 깊다는 얘기도 나온다.

특히 지난달 초 이 대통령의 방일 기간 중 홍 원내대표가 쇠고기 국정조사특위를 열기로 합의해 준 걸 두고 청와대에선 “쇠고기 파문이 잦아드는 마당에 일을 키웠다”는 비판이 많았다. 쇠고기 청문회에 류우익 전 대통령실장 등 ‘이명박 청와대 1기 참모’들이 줄줄이 증인으로 불려 나오게 된 반면 ‘노무현 정부 사람’들은 출석 의무의 강도가 덜한 참고인 자격으로 나오게 된 것도 청와대 쪽을 자극했다. MBC PD수첩 관련자가 아예 증인·참고인 명단에서 빠진 것도 논란이 됐다. 직설적으로 정부에 비난의 화살을 퍼부은 홍 원내대표에 대한 섭섭한 감정도 작용한 것 같다.

청와대의 이런 불만에 대해 원내대표단은 “여당으로서 원 구성을 해야 한다는 중압감이 컸다”(주호영 원내 수석부대표)고 말한다. 그러나 당내에서조차 “청와대에 정치적 부담을 안겼다”(안경률 사무총장, 임태희 정책위의장)는 비판이 나왔다.

고정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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