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보균의 세상 탐사] 박근혜냐 한승수냐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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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호 02면

광우병 시위 광장은 변질됐다. 정권에 대한 저항과 불복으로 바뀌었다. 식탁 안전을 걱정했던 순수한 국민의 목소리는 뒷전으로 밀렸다. 정권 퇴진 구호의 한복판에는 지난 10년의 전성기를 구가했던 세력들이 버티고 있다. 이명박 정권은 얕잡아보였다. 대통령 주변에 책사(策士)도 드물고 용장(勇將)도 없다. 리더십은 유약하다. 반대세력은 그 약점을 신속히 간파했다. 그들은 소용돌이 속에서 이명박 정권을 무력화시킬 수 있다고 확신한다. 촛불은 끈질기게 타오를 것이다.

민심은 명쾌한 인사 쇄신을 요구해왔다. 청와대는 엉거주춤하다. 여론 눈치를 보고 있다. 한승수 총리를 유임시키기로 가닥을 잡았다고 한다. 한 총리는 독특하고 노련한 합리주의자다. 그러나 비상 시국에는 벅차다. 그의 효용성은 태평성대 때나 어울린다. 그에게 ‘책임 총리’라는 모자를 씌어준다고 한다. 어설픈 아이디어다. 그에게 난국 돌파의 임무를 주는 것은 무리다.

‘한 총리 유임’ 발표를 하면 어떻게 될까. 이 대통령이 민심에 쏟은 정성은 허망하게 날아간다. 공들여 표출했던 자책과 반성은 한순간에 외면당한다. 쪽박을 찰 것이다. 위기의 대란(大亂)상황은 국정을 일신하는 대치(大治)로만 다스릴 수 있다. 그 속에서 새 출발의 힘찬 동력을 얻는다. ‘박근혜 총리’카드는 일단 그것을 보장한다. 이명박 정권에 대한 국민적 기대감이 살아날 것이다. ‘강부자’인사, 쇠고기 수입 정책 독선, 속 좁은 정치,권력 내분에 분개하고 실망했던 국민은 이 대통령을 새롭게 볼 것이다.

이명박 정권은 촛불에 꼼짝없이 당했다. 대선 지지자들이 떨어져 나간 탓에 더욱 속수무책이었다. ‘박근혜 카드’의 효험은 집토끼의 재결집을 이뤄 낼 수 있다. 좌에서 우로, 진보에서 보수로 10년 만의 거대한 이동을 이끈 주역이 그들이다. 이 대통령은 그걸 바탕으로 포용의 이미지를 다듬어 국민 전체에 다가가야 한다.

청와대 내부에 ‘박근혜 총리’ 카드에 반대하는 의견이 많다. “대통령이 레임덕(권력 누수)된다”는 논리다. 거리에서 이 대통령은 형편없이 조롱당하고 있다. 레임덕을 거론하는 것은 한가하고 배부른 소리다. 권력의 속성상 맞지 않는다. 내각의 권한을 떼어줘도 대통령의 권위는 상처받지 않는다.

국정 추진력은 지지 세력의 결속에서 우선 생산된다. 감동의 리더십 속에서 만들어진다. 민심의 치명적 이반은 집토끼의 집단 이 탈에서 시작한다. 지지자들을 모아 허물어진 정권 기반을 다지는 게 이대통령에게 시급하다. 대통령 주변의 아마추어 참모들은 권력 관리의 그런 속성을 실감하지 못한다. 국정의 우선순위를 짜지 못한다. 그들은 ‘박근혜 총리’ 카드 때문에 자기들의 알량한 권력이 줄어들까 신경 쓴다. 한 총리 유임에 대한 집착은 버려야 한다.

‘박근혜 총리’ 카드가 마땅치 않으면 국민투표가 있다. 헌법의 국민투표(제72조) 방식에 의존하는 거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은 국가 안위(安危)를 흔드는 외교 정책이다. 국민투표를 하면 이 대통령은 승리한다. 패배하면 대통령에서 하야하겠다며 배수진을 쳐야 한다. 국민 다수는 “미국산 쇠고기를 먹으면 광우병에 걸린다”는 괴담의 형편없는 과장과 거짓을 알기 시작했다. 정권 퇴진과 폭력 시위를 반대한다. 진실 대 거짓의 대결, 경제 살리기 대 경제파탄 세력의 승부로 끌고 가면 이긴다. 국정 주도권을 일거에 되찾을 수 있다. 과거 노무현 대통령이라면 승부를 걸었을 것이다.

두 개의 카드 모두 꺼림칙하면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여론의 망각증에 의존하는 방안이다. 국면 전환용 사건이나 동정과 연민이 생기길 바라는 것이다. 지난해 후보때 탈레반의 한국인 납치, 신정아 스캔들이 터져 이 대통령은 도움을 받았다.

결단 없는 정치는 대가가 따른다. 국정을 꾸려가기 어렵다. 경제 살리기는 쉽지 않다. 경제 회복은 정권의 권위와 법 질서가 살아야 가능하다. 통치는 선택이다. 국정은 결단이다. 이 대통령은 기로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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