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설 없는 혁명은 정치 불량배들이 하는 짓”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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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호 38면

장징장은 한쪽 다리가 불편했지만 산에 오르기를 좋아했다. 교자를 타고 저장성 모간산(莫干山)에 오른 장징장. 김명호 제공

‘강남제일가(江南第一家)’는 열 손가락을 다 동원해도 헤아리기가 부족하다. 그러나 ‘강남제이가(第二家)’는 저장(浙江)성 후저우(湖州)부 난쉰( )진(현 후저우시 난쉰구)의 장씨일가(張氏一家)가 유일하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6>현대판 여불위 <上>

19세기 중엽 오구통상(五口通商)이 실시됐다. 창장(長江) 삼각주 일대에서 생산되는 견직물이 상하이를 통해 수출되기 시작했다. 난쉰은 중국 최대의 생사(生絲) 집산지였다. 방직업으로 부를 쌓은 거상(巨商)들이 잇따라 출현했다. ‘사상(四象) 팔우(八牛) 칠십이구(七十二狗)’가 그들이다. 재산 규모를 동물의 크기에 빗대어 코끼리·소·개로 표현했다. 장씨 집안은 사상 중 하나였지만 장징장(張靜江)을 배출했기 때문에 천하에 명성을 떨쳤다. ‘민국기인(民國奇人)’과 ‘현대의 여불위(呂不韋)’가 그의 별명이었다. 쑨원(孫文)은 그를 ‘혁명성인(革命聖人)’이라 불렀다.

1877년 태어난 장징장은 소년 시절 성격이 급했다. 좁은 골목에서 요리조리 말을 타고 질주해야 직성이 풀렸다. 성년이 되기 전에 다리가 망가졌고 한쪽 눈을 실명했다. 서화(書畵)에 열중해 조맹부( )와 동기창(董其昌)을 임모(臨摸)하며 분을 삭이려 했지만 하루 이틀이라면 몰라도 평생 할 짓은 못 됐다.

19세에 결혼을 자축한다며 서구식 저택을 한 채 지었다. 자재는 모두 프랑스에서 수입했다. 집 좌우에 테니스코트와 인공호수도 만들었다. 호수에는 빈틈없이 연꽃을 심었다. 전형적인 강남 대부호의 자제다운 행동이었지만 비슷한 일을 오래 하지는 않았다. 20세 전에 대충 하고 끝내 버렸다.

장인(丈人) 따라 베이징 구경 갔다가 이홍장(李鴻章)의 손자 리스쩡(李石曾)을 알게 됐다. 흠차대신(欽差大臣)을 수행해 파리에 간다는 말을 듣고 함께 가자고 졸라댔다. 1902년 상무참찬(商務參贊) 자격으로 리스쩡과 함께 프랑스에 도착한 장은 대대로 내려오는 상인 기질이 발동했다. 파리에 ‘통운공사(通運公司)’라는 회사를 설립했다. 중국인이 프랑스에 세운 최초의 무역회사였다. 중국의 골동품 도자기와 차·비단 등을 취급했다. 헤아리기 힘들 정도의 돈이 들어왔다. 뉴욕과 런던에도 지사를 설립했다.

프랑스는 그의 운명을 바꿔 놓은 곳이었다. 무역업을 하며 무정부주의에 심취했다. 리스쩡, 차이위안페이(蔡元培) 등과 함께 유럽의 중국인 유학생들에게 혁명사상을 전파하겠다며 잡지도 발간했다. 보는 사람마다 붙잡고 혁명을 역설했지만 워낙 맹목적이었다. 정부에서 파견한 밀정으로 오해받아 진짜 혁명당원들에게 여러 차례 목숨을 잃을 뻔했다.

쑨원을 만난 건 우연이었다. 싱가포르에 가던 중 쑨원이 같은 배에 타고 있다는 말을 듣고 찾아갔다. “군(君)이 혁명에 매진한다는 소리를 들은 지 오래다. 혁명이 아니면 중국을 구제할 방법이 없다. 돈이 필요할 때 연락하라”면서 암호(暗號)를 정해줬다. 알파벳 순서대로 A는 1만원, E는 5만원 하는 식이었다. 헤어지며 미국에 가거든 뉴욕 5번가 566호에 가서 3만 달러를 찾으라고 했다. 되건 안 되건 큰소리부터 치고 보던 쑨원도 어안이 벙벙했다. 이때부터 큰돈이 필요할 때마다 적시에 장징장이 돈을 보내왔다. 한 혁명가의 일기에 적힌 대로 “눈이 내릴 때마다 석탄을 보내준 사람”이었다. 한번은 거사에 필요한 돈을 급히 마련하느라 파리에서 잘나가던 찻집을 헐값에 매각하기도 했다. 쑨원이 사용할 곳을 설명하려 하자 “동지 간에는 묵계가 있어야 한다”며 들으려 하지 않았다. “이런 협객이 있는 한 혁명은 실패하지 않는다”는 말이 혁명당원 사이에 나돌았다.

어중이떠중이 할 것 없이 혁명을 타령하던 시대였다. 혁명과 개혁을 입에 달고 다니는 앵벌이들이 사방에 널려 있었다. 계산에 빠른 상인들은 이들을 저울질하기에 바빴지만 장징장은 쑨원을 만나는 순간부터 모든 재산을 혁명에 쏟아 부었고 중국의 부를 상징하던 난쉰 사상팔우(四象八牛)의 자제 대부분을 혁명에 끌어들였다.

1925년 쑨원이 세상을 떠날 때도 곁에 있었다. 쑨원의 뒤를 이어 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 주석에 추대됐다. 얼마 후 다리가 불편하다는 이유로 장제스(蔣介石)에게 당권을 물려주고 본격적인 중국 건설에 나섰다. “건설이 따르지 않는 혁명은 정치 불량배들이나 하는 짓”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下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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