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詩)가 있는 아침 ] - '살구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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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문신 (1973~) '살구꽃' 부분

해마다 사월이면 쌀 떨어진 집부터 살구꽃이 피었다

살구꽃은 간지럽게 한 송이씩 피는 것이 아니라 튀밥처럼, 겨우내 살구나무 몸통을 오르내리며 뜨겁게 제 몸을 달군 것들이 동시에 펑, 하고 터져나오는 것이었다

살구꽃은 검은 눈망울을 단 아이들이 맨발로 흙밭을 뒹구는 한낮에 피는 것이 아니었다

살구꽃은 낮은 지붕의 처마 밑으로 어둠이 고이고, 그 어둠이 꾸벅꾸벅 조는 한밤중에 손님처럼 가만히 피어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새벽이 오면 오갈 데 없는 별들의 따뜻한 거처가 되어주기도 하는 것이었다

살구꽃이 피는 아침이면 마을 여기저기서 쌀독 긁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이었다



야간산행을 하다. 자정의 시각 선암사를 출발해 아침 햇살이 펼쳐지는 시각 송광사에 도착하다. 걷다가 마른 풀덤불에 등을 대고 눕다. 하늘의 별밭이여, 무슨 꿈들이 모여 그리 아늑한 꽃밭을 이루는가. 산 아래 암자는 오래 등을 켜고 있다. 저곳에도 누군가 생의 애간장 밤새 끓이고 있는지…. 날이 새다. 사하촌 마을은 갓 핀 살구꽃 살구꽃…. 연분홍 저 꽃밭이 지난밤 별들의 따뜻한 거처라고 시인은 이야기한다.

곽재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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