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달아 높이곰 돋아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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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애초에 미스터 조는 프로메클레스 같았다.지적(知的)인 번뜩임과 아르바이트하며 공부하는 다부짐이 지성과 행동력을 함께 지닌멋진 남성으로 비쳤다.
아이를 유산하지 않고 그와 결혼했었다면 아리영은 지금쯤 어떤모습의 여자가 돼 있을까.한가지 분명한 것은 한 아이의 어미가돼 있으리라는 사실이다.그리고 중도에 공부를 포기한 채 내내 알음알이에 대한 갈증으로 허우적거리며 살고 있 으리라 상상된다.냉소적인 미스터 조가 그런 아내를 사랑으로 품어 따뜻이 키워주었을 것같지도 않다.
미스터 조가 아니라 처음부터 우변호사를 만났어야 했다.우변호사야말로 프로메클레스다운 남자가 아닌가.그러나 시계바늘을 거꾸로 돌릴 수는 없다.
잠이 올 것같지 않아 체념하고 일어났다.남편은 조금씩 코를 골며 곤히 자고 있다.
탁자 위의 『삼국유사』를 들고 거실로 나와 스탠드불을 밝혔다.수로부인 대목이 저절로 펼쳐진다.계속 그 자리만 펴서 읽었더니 길이 든 모양이다.
「…수로부인은 아름다운 용모가 세상에 뛰어나 깊은 산이나 큰못을 지날 때마다 여러차례 신물(神物)에게 붙들렸다.」 경주에서 포항을 거쳐 강릉까지는 당시 며칠 길이었을까.모르긴 해도 그리 많은 낮밤이 소요됐을 것같진 않다.
그 며칠 안되는 사이에 수로부인은 「여러차례」 유괴당했다.미인의 경우 유괴는 「강간(强姦)」을 의미한다.
「큰못의 신물」이란 「얼치」를 가리킨다고 서여사는 일러주었었다. 「얼」은 「샘」「연못」,「치」는 「왕」「귀인」「남자」「남근」「동물」의 우리 옛말이다.그러니까 「얼치」는 「샘(연못)지기」「샘(연못)왕」「연못 짐승」의 뜻이다.
고대엔 물을 지배하는 자가 나라를 지배했다.물은 권력의 원천이었다.벼농사도 물이 있어야 가능하고,무쇠 만들기도 물이 없으면 불가능했다.쌀은 으뜸가는 식량이었고,무쇠는 농기구와 화살촉.칼 등 무기를 만드는 필수 원자재였다.물을 다스 리는 자는 곧 그 고장의 최고 권력자였음을 알 수 있다.
서여사가 빌려준 일본책에 의하면 「큰 구렁이」는 일본 옛말로「어로치(をろち)」다.「어로치」란 우리말 「얼치」가 일본식으로바뀐 낱말이다.큰 구렁이는 큰 연못에 서식하는 동물이었던 까닭에 이렇게 불린 것이다.옛 문헌에 「샘지기」가 「구렁이」로 표현되어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아름다운 여인을 밤마다 찾아와 동침(同寢)하고 가는 사나이가있어 그의 정체가 궁금하여 몰래 따라갔더니 산중 연못에 사는 구렁이었다는 전설이 일본엔 많이 전해져 있다 한다.구렁이는 그지방 최고의 권력자를 상징한 것이다.수로부인도 그 고장 토호(土豪)와 섹스했다는 얘기가 된다.
글 이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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