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시평

역사가 기억할 17대 국회의 마지막 모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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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17대 국회, 정녕 이렇게 막을 내리고야 마는가? 야당은 한·미 쇠고기 협정을 문제삼으면서 재협상이 되지 않으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은 없다고 한다. 국회 다수당인 야당의 협조없이, 특히 과거 여당이었던 통합민주당의 협조가 없으면 한·미 FTA 비준은 17대 국회에서는 불가능하다.

17대 국회에서 비준안 동의를 얻지 못하더라도, 18대 국회에서 비준 동의를 처리하면 되기는 하다. 총선에서 과반을 차지한 한나라당 표를 계산해 보아도 산술적으로 가능하다. 문제는 필요 이상의 행정비용 낭비와 한국 국회 조기 비준으로 인한 전략적 가치가 약해진다는 것이다. 비준안은 어느 날 덜렁 본회의에 상정돼 표결되는 것이 아니라, 상임위부터 논의가 시작되고 적법한 절차를 거쳐야 한다. 18대 국회가 개원되면 상임위 구성을 해야 하고, 상임위원장 배정을 둘러싼 정당 간의 샅바싸움부터 할 판이다. 상임위에서 분명 쇠고기 협상이 논란거리일 것이고, 야당은 공청회·청문회·국정조사 등 모든 가능한 방법을 다 동원해 현 정부를 공격할 것이다. 국민 세금으로 진행될 이 모든 것의 기회비용을 생각해 보라.

이미 17대 국회는 한·미 FTA의 모든 진행 과정을 지켜보고, 감시하고, 견제해 왔다. FTA 문제의 소관 상임위인 통일외교통상위원회만으로도 모자라 특위까지 만들고 협상기간 내내 특위를 가동시켜 왔다. 한국 행정부의 모든 협상 내용이 공개되고 민감한 문서까지 열람되었다. 공청회와 청문회도 여러 차례 개최했다. 이제 와서 더 이상 들추어 낼 것도 없고, 모든 의혹은 제기할 만큼 제기했고, 경제효과와 예상되는 충격에 대한 논란도 할 만큼 했다. 결정의 순간만이 남아있는 것이다. 18대 국회에서 이 모든 것을 다시 진행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미국 의회의 한·미 FTA에 대한 시큰둥한 태도는 분명 못마땅하다. 미국 의회를 장악하고 있는 민주당 지도부는 지난해 6월 말 협정 서명식 바로 직전 한·미 FTA 반대성명을 내 고춧가루를 뿌렸다. 이들이 내세우고 있는 이유는 FTA 협정이 미국에 불리한 불공정 협정이라는 것이다. 세상에, 한국의 반대 집단들은 한국에 불리한 협정이라고 난리인데. 그들은 명시적으로 자동차와 쇠고기를 문제삼았다. 미국 부시 행정부는 쇠고기 문제는 한국과 풀고, 자동차는 미국 의회를 설득하고 교육하겠다는 입장이다. 쇠고기가 해법을 찾은 상황에서 미국 의회 비준 획득 여부는 부시 행정부가 풀어야 할 숙제다. 만약 한국 국회가 비준안에 동의한다면 자동차 재협상은 물건너 간다. 미국 의회의 자동차 재협상 요구는 FTA를 하지말자는 이야기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국익을 고려한다면 17대 국회는 한·미 FTA 비준안을 처리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정권 획득을 최고의 도덕률로 내세우는 정당에다 국익을 고려해 FTA를 비준하라는 주장은 공허하게 들릴 수 있다. 더구나 그 정당이 대선에서 궤멸하다시피 참패하고 총선에서도 수도권 기반을 다 까먹고 지역정당 수준으로 전락해 회생의 기회를 노려야 하는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국익 타령은 한가롭기까지 할 지 모른다. 그러나 통합민주당이 지역구도에 안주하지 않고 정권 재탈환을 진정으로 원하는 정당으로 거듭나려면 정치공세와 국익쯤은 구분해야 한다.

지금은 이명박 정부의 결과중심 실용노선이 자초한 협상과정 관리의 미숙함과 비준안 및 쇠고기 협상에 대한 입체적인 전략 부재로 인한 반사이익을 즐기고 있지만, 여기에만 편승하려 한다면 언제 부메랑이 되어 그들에게 날아갈지 모른다. 쇠고기 때문에 FTA 비준을 하지 않겠다는 통합민주당의 주장은 설득력은 없다. 지난 정권과 비교해 쇠고기 협상의 내용이 180도 바뀌었다고 공세를 펴고 안전성 논란을 연일 제기하지만, 협상의 큰 틀은 이미 지난 정권에서도 방향을 잡았던 부분이다. 노무현 대통령도 지난해 4월 한·미 FTA 협상이 타결된 날 발표한 국민담화에서 쇠고기 문제는 국제적 기준에 따라 합리적인 기간 내에 해결키로 약속한 바 있다. 협정의 큰 틀까지 부정하는 태도는 한때 정권을 담당했던 여당답지 못한 태도다. 17대 국회는 5월 말에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통합민주당의 대승적 결단을 기대해 보기에 부족한 시간은 아니다.

최병일 이화여대 국제대학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