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이너 김치호, 한국디자인 현주소를 말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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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실 중앙을 차지하고 있던 TV가 집 안에서 사라진다면? 지난 4월, 이탈리아 밀라노 가구박람회에서 디자이너 김치호(40)는 TV의 자취를 감쪽같이 없앴다. TV는 더 이상 엔터테인먼트 아이템이 아닌 가구의 일부가 되었다.


  이탈리아의 유명 일간지 라 리퍼블리카(La Republica) 5월 2일자 라이프 1면은 온통 새로운 개념의 TV 얘기로 가득 찼다. 거울과 장식장 혹은 파티션으로 재탄생한 TV는 국내 디자이너 김치호의 작품들이다.
  그는 ‘더 이상 TV가 존재하지 않는 집(no more TV house)’이란 주제로 10점의 작품을 소개했다. 내부에 옻칠한 자개장 옆면에, 3㎜짜리 얇은 유리 거울 속에, 그리고 유리벽 사이에 2.5㎝ 두께의 LCD 패널을 달았다. 전원을 켜면 자개장과 거울 속에서 TV가 나오고 끄면 까만 유리 거울이 된다. TV가 있지만 동시에 존재를 감추고 있는 일명 ‘숨겨진 TV’다.
  “밀라노는 세계 제일의 가구 생산도시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웬만한 제품으로는 그들과 경쟁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우리나라 전통 소재인 자개를 선택했다. 고급스러우면서도 우리 고유의 정서가 오롯이 묻어나는 자개야말로 그들과 차별되는 유일한 것이라고 판단했다.
  “밀라노 가구 박람회에선 해마다 수 천 개의 크고 작은 전시가 열립니다. 그러니 해외 바이어를 비롯한 30여 만 관람객의 시선을 잡기란 하늘의 별 따기죠. 전통의 완벽한 재현이나 재해석만이 살 길이라 믿었습니다.”
  그는 이번 프로젝트를 1년 전부터 준비해왔다. 지난해 이미 서울리빙디자인페어에서 나전칠기를 이용해 새로운 공간의 반전을 선보인 바 있다. 그때 연이 닿은 유리 전문 디자인 회사 ‘디엔디 까사’의 권혁상 대표와 한국 자개협회 장춘철 회장이 이번 전시의 든든한 조력자가 돼 주었다. 유리 안에 스크린을 숨기는 세계 특허기술을 소유한 독일 애드 노탐사의 매직 미러 TV를 한국적인 아름다움으로 승화하려는 권 대표와 사양길로 접어든 전통공예에 돌파구를 찾고 싶은 장 회장의 바람이 어우러진 것이다.
  인테리어와 접목한 TV는 동서양의 조화 및 전통과 미래의 결합을 보여준다. 김치호는 유럽의 클래식함을 바탕으로 유리 거울을 커팅하되 복을 기원하고 행운을 가져다 주는 12간지로 디자인했다. 또 빛에 따라 컬러가 바뀌는 자개는 심플한 타일 형식으로 배열했다. 블랙과 화이트 컬러의 모던한 대조 효과는 럭셔리하면서도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했다. LCD 화면에서는 자개를 만드는 과정, 옻칠하는 장면, 한국의 꽃 등이 영상으로 재현됐다.
  그는 이번 전시를 통해 한국 디자인의 무한한 가능성을 믿게 됐다.
  “우리의 것을 구시대적이라고 낮잡아보지 말고 새로운 관심을 갖고 지속적으로 연구한다면 충분히 발전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특히 전통 공예가들과의 협동작업이야말로 우리가 가진 커다란 장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기회만 된다면 내년에도 장인들과 공동 프로젝트를 하고 싶단다. 하루 24시간이 모자라는 그에게 관심 가는 소재가 있냐고 물었다.
  “화문석·도자기·목공예·한지 등 너무 많아서 탈”이라며 너털웃음 짓는 그의 모습에 일순간 하회탈이 오버랩됐다.

디자이너 김치호
He is... 건국대학교 산업디자인학과를 졸업하고 밀라노 도무스아카데미에서 공간디자인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졸업 후 이탈리아의 알레산드로구에리에로의 디자인스튜디오에서 일했다. 현재 국내에서는 치호 &파트너스(Chiho&Partners)라는 이름으로 공간디자인 스튜디오를 운영하고 있다. 2002년 서울리빙디자인페어 참여를 계기로 한국에서 전시디자인 프로젝트를 시작했고 현대백화점 리모델링을 비롯한 상업 공간은 물론 현대건설·GS건설 등의 주거공간 디자인까지 맡고 있다.

프리미엄 김혜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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