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고가던 車 뒤집혀 매몰…다리 부상 입은 채 극적 탈출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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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호 04면

한국 유학생 5명이 중국 쓰촨(四川)성 원촨(汶川) 대지진 참사 와중에 극적으로 살아남았다. 이들은 이번 대지진 지역에서 고립됐던 유일한 한국인이었다. 5만 명 이상이 숨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대참사 와중에 이들이 살아남은 것은 천우신조(天佑神助)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극적이다. 특히 이들은 지진 피해가 컸던 진앙지 원촨현 잉슈(映秀)·워룽(臥龍) 등지를 두루 돌아다녔음에도 재난을 피했다. 유학생들이 여행한 이들 지역에서만 17일까지 수천 명이 목숨을 잃었다.

대지진서 살아 돌아온 한국 유학생 5명

손혜경씨가 16일 원촨현 잉슈에서 기자와 만나고 있다. 한국일보 제공

지진 발생 직전 이들은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등록된 주자이거우(九寨溝)의 원시 비경을 만끽했다. 그 다음날 대지진의 충격과 공포를 온몸으로 체험했다. 불과 하루 사이에 천당과 지옥을 모두 체험한 것이다. 삶과 죽음이 교차한 이들의 여행 코스를 역추적해 봤다.

천국 같은 천혜의 원시 비경 만끽
5명의 유학생은 톈진(天津)외국어대학에서 함께 공부해온 친구 사이인 것으로 전해졌다. 안형준(28)·손혜경(23·여)씨는 부산외국어대학 재학생으로 톈진외국어대학에서 교환학생으로 연수 중이었다. 백준호(24)·김동희(26·여)·김소라(23·여)씨는 톈진외국어대학 유학생이었다고 한다.

이들은 안형준·손혜경씨의 어학연수가 7월에 끝나는 것을 기념해 6일부터 18일간 중국 내륙 여행을 함께하기로 뜻을 모았다. 이들은 “먼저 안후이(安徽)성 황산(黃山)을 출발해 시안(西安)의 진시황 병마용(兵馬俑)을 구경하고 쓰촨성으로 이동할 계획”이라고 톈진의 친구들에게 알렸다.

유학생들은 8일부터 사흘간 주자이거우 일대를 샅샅이 훑으며 원시 비경을 답사한 것으로 전해졌다. 주자이거우는 수만 년의 신비를 고스란히 간직한 천혜의 자연보존 지역이다. 중국 여행자라면 꼭 한 번 가봐야 할 곳으로 꼽힌다.

주자이거우를 여행할 때만 해도 이들은 대자연이 수만 명의 목숨을 단숨에 빼앗는 엄청난 심술을 부릴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만큼 주자이거우는 자연이 빚어낸 지상 낙원의 이미지로만 가득했다.

사지 같은 진앙지로 걸어 들어가다
주자이거우를 떠날 무렵 일행 중 누군가가 “워룽 판다 보호구역에 가보자”고 제안했다. 판다는 중국을 대표하는 상징 동물이다. 워룽은 멸종 위기에 처해 중국 정부가 ‘국가 보호 동물’로 지정한 판다의 대표적인 서식지다. 이 구역에는 야생 판다 150마리가 살고 있고 판다 연구센터에선 130마리를 사육하고 있다. 유학생 일행은 워룽을 들르기로 의견을 모았다.

대지진이 터진 운명의 12일. 이들은 차를 대절해 잉슈를 경유해 워룽으로 들어간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이 지나간 경로를 보면 공교롭게도 규모 7.9의 강진이 집중 강타한 룽먼산(龍門山) 지진대가 펼쳐진 지역이다. 유학생들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겠지만 불과 몇 시간 후 대재앙이 일어날 땅 위를 겁 없이 걸어 들어간 셈이다.

대지진이 강타한 12일 오후 2시28분. 유학생들은 워룽에 체류한 것으로 나중에 확인된다. 유학생들은 차를 타고 이동하다 지진의 충격으로 차가 전복되면서 운전자가 매몰된 뒤 가까스로 탈출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과정에서 한 유학생이 다리와 손가락을 다쳤다.

지진이 나기 전까지 이들은 톈진에 있는 친구들과 휴대전화 문자 메시지를 수시로 주고받았다. 그러나 지진 발생 직후부터 통신이 전면 두절되면서 나흘가량 소재를 파악할 수 없었다. 부산에 사는 한 유학생의 부모가 14일 부산외국어대학에 신고하면서 이들의 실종 사실이 처음 공개됐다. 이 사실은 외교부를 통해 청두 총영사관에 통보됐다. 총영사관 측은 쓰촨성 공안국과 관광국 등을 통해 소재 파악에 나섰다. 그러나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 다행히 한 유학생의 중국인 여자친구가 “일행이 판다 구경을 위해 워룽으로 간다고 했다”고 제보했다. 이를 토대로 청두 영사관은 워룽 판다보호구역을 관리하는 쓰촨성 임업국을 접촉해 15일 이들의 생존 사실을 확인했다.

유학생들은 당초 16일 워룽에서 헬기를 타고 청두 시내로 후송될 예정이었다. 한 유학생은 군용 위성전화를 이용해 부모에게 “헬기를 타고 병원으로 이동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악천후 등을 이유로 헬기 탑승이 여의치 않자 이들은 40여㎞를 걸어 진앙지 잉슈로 다시 이동했다. 유학생들은 잉슈의 ‘중국 국제 SOS 구호센터’에서 청두행 헬기를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다. 지상의 천국과 생지옥을 모두 체험한 이들의 여행은 그 어떤 여행보다 충격과 공포를 남기고 마침표를 찍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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