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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행사와 정치 행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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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서울 광화문 거리에서 열린 탄핵 반대 촛불집회가 불법이냐 합법이냐, 즉 정치행사냐 문화행사냐를 놓고 경찰과 집회 주최 측이 옥신각신하던 지난주 중반, 부산에서는 특수절도 혐의자 3명이 해운대경찰서에 붙잡혔다.

고물수집업자 朴모(42)씨 등은 기장군에 설치된 부산 비엔날레(2002년) 출품작 '별을 닮은 바다'를 금속절단기로 두 동강 낸 뒤 차에 실어 가려다 들켰다고 한다. 이 작품은 높이 4m.너비 8m에 무게가 2.5t이나 나간다. 고철값이 턱없이 뛴 요즘이라 朴씨 일당에게는 맨홀 뚜껑 수십개나 과수원의 철사 울타리 수km에 버금가는 '돈덩이'로 보였을 것이다. 덕분에 작품은 진짜 고철덩어리로 변했다. '문화'가 파괴된 것이다.

朴씨에게는 '특수절도'혐의가 적용됐지만 광화문 집회 주최 측이 주장하는 '문화행사'는 조금 복잡하다. 가수들이 나와 노래를 부르고 시민들이 하고 싶은 말도 하는 축제 같은 '문화 한마당'이라고 주최 측은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혁명을 완수하는 일이다" 등 참석자들의 발언과 집회가 야간까지 이어진 점을 볼 때 불법 정치행사임에 틀림없는 것 같다.

'문화(文化)'라는 말은 19세기 후반 메이지(明治)시대에 일본 학자가 만들어 냈다. 독일어 '쿨투어(Kultur)'를 한자어로 옮긴 것이다. 중국 문헌 '설원(說苑)' 등에도 문화라는 단어가 나오지만, 그 뜻은 '형벌 같은 강제력을 사용하지 않고 학문이나 교육으로 국민을 계도하는 일'이었다. 일본인들이 여기에 새 의미를 부여했고, 우리나라에도 수입된 것이다.

물론 '자연 상태에서 벗어나 일정한 목적 또는 생활 이상을 실현하고자 사회 구성원에 의해 습득.공유.전달되는 행동양식이나 생활양식의 과정 및 그 과정에서 이룩해 낸 물질적.정신적 소득을 통틀어 이르는 말'(표준국어대사전)이라는 포괄적 정의에 걸맞게 '문화'의 쓰임새는 아주 다양하다. '시위문화'에서 '성(性)문화'까지 무엇이든 갖다 붙이면 말이 될 정도다. 따라서 "정치와 문화가 그렇게 별개일 수 있느냐"는 반론도 가능하다. 혁명기의 러시아가 '영화열차'를 운용했듯이 문화가 강력한 정치 수단으로 동원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래도 문화는 문화다. 문화와 정치의 교집합(交集合)에만 주목하지 말고 문화의 독자적 영역에 눈길을 돌려야 한다. 朴씨가 경찰서에서 "우리가 한 일은 비엔날레 출품작을 주제로 한 행위예술"이라고 우긴다면 누가 들어주기나 하겠는가. 광화문 집회는 어디까지나 불법 정치행사지, 문화행사가 아니다.

문제는 그 다음에 있다. 불법이고 정치성이 농후하지만, 광화문 집회의 모든 참석자에게 그런 굴레를 씌우는 것은 분명히 문제가 있다. 법과 정치의 망(網)으로 포착되지 않는 측면이 너무 많아 보인다. 특정 정당이 참석을 독려하는 문자메시지를 날리고, 버스를 동원하고, TV에 나와 집회 참가를 부추긴다 해도 '13만명'(지난 주말 참가자.경찰 추산)을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그것도 2% 모자란 게 아니라 98%가 부족하다. 기자의 주변에서도 "재작년 월드컵의 추억이 살아나서" "1987년 6월 항쟁에 동참하지 못한 게 찜찜했던 터에" "그냥 재미있을 것 같아서" 등등 참가 동기가 무척 다양했다.

정작 걱정할 것은 사전동원 시비 같은 게 아니라 '사후 악용' 가능성이다. 이미 광화문 주변에선 정치꾼들이 하이에나 같은 눈초리로 먹잇감을 노리며 표 계산이 한창이다. 그런 사람들에게도 '특수절도' 혐의를 적용할 순 없을까.

노재현 문화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