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어린이날이 부끄러운 우리 사회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2면

오늘 어린이날을 맞는 우리 사회는 부끄럽고 참담하다. 어린이를 제대로 보호하지 못하는 죄가 참으로 크다. 혜진·예슬양 납치 살해사건에 치를 떤 게 엊그제인데, 대구 초등학교 집단 성폭력 사건은 또 뭐란 말인가. 어린이를 보살피고 지켜야 할 어른들은 방임자가 돼버렸고, 학교마저 더 이상 안전지대가 아니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됐는가. 신상철 대구시교육감은 어린이날을 맞아 피해 어린이에게 쓴 편지에서 “행복해야 할 오늘, 아파하는 너희를 생각하면 부끄럽고 안타까워 눈물을 감출 수 없다” 고 했다. 어디 부끄러운 게 신 교육감뿐이겠는가.

더 이상 우리 어린이들을 유괴나 실종, 성폭력에 그대로 방치해 둬선 안 된다. 여성부와 경찰청은 얼마 전 ‘우리 아이 지키기 캠페인’ 선포식을 했다. 교육과학기술부는 성폭력 예방대책을 내놨다. 여당은 어린이날을 맞아 ‘어린이 지키기 원년’을 선포했다. 이런 것들이 구호로만 끝나선 안 된다. 어린이를 보호할 수 있는 실질적 대책으로 구체화돼야 한다.

무엇보다 음란물의 근본적인 차단책이 긴요하다. 어린이들조차 인터넷이나 케이블방송의 음란물에 무방비로 노출돼 있는 게 우리 현실이다. 이는 왜곡된 성의식과 모방 성범죄로 이어질 공산이 크다. 경찰 조사에 따르면 학교폭력 가해 학생의 55%가 음란 사이트를 접했고, 이 중 42%가 모방 충동을 느꼈다 한다. 음란물 진원지에 대한 규제가 절실하다. P2P(파일 공유) 사이트가 음란물을 삭제하지 않을 경우 과징금으로 끝낼 게 아니라 운영자를 실형에 처해야 한다. 겉돌고 있는 학교 성교육도 근본적으로 뜯어고쳐야 한다. 보건교육을 정규 교과목으로 전환해 지속적인 성교육을 실시하는 게 대안이다.

야생 코끼리 무리는 어린 생명들을 서로 돌봐주는 사회성을 갖고 있다 한다. 어미 코끼리가 병이나 사고로 죽어도 다른 어미들이 남겨진 새끼를 거둬 보호한다는 것이다. 하이에나 무리도 그렇다고 한다. 하물며 사람 사는 사회가 아닌가. 우리 사회의 미래인 어린이들을 제대로 보호하지 못하면 내년에도 행복하고 즐거운 어린이날은 기대하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