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인쿠폰, 밥상 메뉴를 좌우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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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7일 이마트 용산점. 10개 3480원에 팔던 오렌지를 2700원으로 ‘반짝 할인’해 팔자 사람이 붐비지 않는 오후 5시인데도 많은 주부가 몰려들어 오렌지를 고르고 있다. 이마트 측은 반짝 할인을 기다렸다가 사는 고객이 부쩍 늘었다고 전했다. [사진=오종택 기자]

28일 오후 주부 김승옥(53)씨는 서울 송파구의 대형 할인점을 찾았다. 카트를 미는 그의 손엔 쿠폰북이 쥐여져 있었다. 물냉면을 집어 들고 고심하던 김씨는 쿠폰북을 뒤져본 뒤 카트에 담았다. ‘30% 할인’ 쿠폰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우유는 1팩을 사면 하나 더 주는 ‘1+1’ 상품을 샀다. 쇠고기는 신선식품 재고 정리를 위한 50% 할인 행사에서 샀다. 소시지 매장에선 덤 상품과 30% 할인 쿠폰 상품을 놓고 고민하다가 쿠폰을 사용했다.

김씨가 구입한 상품은 총 11품목. 머스타드 소스와 방향제를 빼곤 모두 쿠폰·행사 상품이었다. 김씨는 “석 달 전보다 네 식구 부식비가 약 10만원 더 든다. 조금이라도 아끼려고 쿠폰, 세일 상품에 매달리니까 딸들이 ‘우리 집은 쿠폰 밥상’이라고 웃더라”며 한숨을 쉬었다. 물가가 폭등하면서 ‘쿠폰족(族)’이 늘고 있다. 여성은 물론 가격에 둔감하던 중년 남성들도 쿠폰 대열에 합류하기 시작했다. 고물가와 불경기가 낳은 중산층·서민들의 ‘생존 전략’이다.

◇“입맛 대신 전단지로 식단 정해”= 서울 문정동 GS마트에 따르면 지난달 고객들에게 발송된 쿠폰북의 사용 비율은 58%에 이른다. 지난해 9월(30%)에 비해 두 배 가까이 늘었다. 이날 만난 주부 10명 중 7명은 “쿠폰과 특가 상품을 이용한다”고 말했다. 임경희(여·53)씨는 “예전엔 쿠폰을 집에 놓고 오면 그냥 장을 봤지만 요즘은 매장에 왔다가도 집에 다시 간다”고 말했다. 당일 할인을 알리는 전단지의 인기도 높다. 26일 영등포동 롯데마트 지하 1층 매장 입구는 전단지를 살피는 주부들로 가득했다. 전단지에 나온 ‘자반 고등어(마리당 980원)’를 찾아 걸음을 옮기던 김윤아(여·35)씨는 “장 보기 전에 살 물건을 메모해 두지만 진짜 결정은 전단지에 달렸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오후 8~9시 이후 할인점을 찾는 ‘올빼미족’도 늘고 있다. 야채·과일·생선 등 신선도가 떨어진 상품을 정리하는 ‘떨이’를 노리는 이들이다. 용산 이마트에 따르면 4월엔 오후 8시 이후 매출이 전체 매출의 약 31%를 차지했다. 매장 관계자는 “야간 매출은 여름철에 느는 법인데 고물가가 낳은 신풍속도”라고 설명했다.

26일 오후 9시 용산 이마트의 김밥·빵 매장 주변을 돌던 윤지수(여·31)씨는 “‘떨이 행사’ 때 사는 버릇이 들어 낮에 사려면 아깝다”고 말했다. 식품 코너 직원인 김모(32)씨는 “9시에 20% 할인을 하고, 30분 간격으로 10%씩 할인율을 높이는데 어떤 손님들은 폐점 직전까지 기다린다”고 전했다. 제과점 직원은 “저녁 손님 10명 중 7명은 ‘세일 손님’”이라고 귀띔했다.

◇중년 남성도 쿠폰 이용 급증= 과거 쿠폰 사용을 외면하던 중년 남성들도 변했다. 이날 이용희(54·회사원)씨는 쿠폰에 나온 오렌지주스를 찾기 위해 직원을 불렀다. 주스 1통(2200원)에 300원을 할인받기 위해서다. 그는 “전에는 ‘창피하다’고 느껴 아내가 챙겨줘도 거들떠보지 않았지만 요즘엔 무시할 수 없다”고 멋쩍게 웃었다.

값비싼 유기농·건강식품을 찾던 ‘웰빙족’도 가격 위주 쇼핑으로 돌아서고 있다. 서울 성수동 할인매장에 만난 김순자(61·주부)씨는 이날 무농약 무쌈(2300원) 대신 중소업체의 무쌈(1180원)을 고르고 있었다. 그는 “ ‘나이 먹으면 몸이 재산’이라지만 요즘 같은 고물가에 몸만 생각할 수 있느냐”고 반문했다.

덤 상품도 주부들에게 인기다. 장보현(여·36)씨는 국수를 사면 덤으로 두부를 주는 행사에서 20대 도우미를 졸라 두부 2팩을 얻었다. 그는 “‘언니(도우미)’에게 잘 부탁하면 1~2개를 더 받는다. 하루 찬거리를 늘리는 셈이라 짭짤하다”고 말했다.

◇업체도 고객 늘어 이득=대형 할인점들은 매출 확대를 위해 쿠폰 발행과 세일 행사를 늘리고 있다. 롯데마트 측은 “불황으로 좀처럼 지갑을 열려 하지 않는 고객들을 끌려는 전략”이라고 설명했다. 값싼 ‘미끼 상품’을 내세워 고객을 유인하는 효과 때문이라는 것이다. 각종 할인을 외면했다간 새 고객 확보는 물론 단골마저 놓칠 우려가 있다. GS마트 관계자는 “물가 급등으로 고객들은 가격에 매우 민감하다”며 “이럴 때는 작은 차이에도 고객이 움직인다”고 말했다.  

글=천인성·임주리·홍혜진 기자, 사진=오종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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