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달아 높이곰 돋아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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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비자림(榧子林)엔 다른 나무도 많았다.비자를 닮은 향긋한 주목(朱木)도 있었다.가을이면 달고 붉은 열매가 가득히 열리는 나무다.단풍과 후박 사이의 자귀나무를 보았을 땐 옛친구 만난듯반가웠다.
『자귀도 있네요!』 거목이었다.키가 3층집 높이 만큼이나 됐다.연분홍 연지솔 같은 꽃송이가 온 나무에 꿈처럼 번져 있었다. 『수령(樹齡)이 2백년은 됐겠는데요.자귀나무를 좋아하십니까?』 나선생이 나무 줄기를 뼘으로 재며 물었다.
『저희 집 마당에도 있어요.돌아가신 어머니가 좋아하셔서 심은건데 한 백년쯤 된 나무라나봐요.자귀도 오래 사는 나문가봐요.
』 『합환화(合歡花)라고도 한다지요? 꽃처럼 관능적(官能的)인이름 아닙니까.』 어머니도 그런 말을 했었다.
어머니 생각이 났다.아름답고 교양있고 완벽한 아내였다.그러나몸은 섬약했다.세상을 일찍이 여읜 데는 아리영 탓도 있었을 것이라고 항상 죄책감으로 돌이키게 된다.어머니는 미스터 조를 끝내 미워했고,또 그런 어머니를 아리영은 미워했다 .「미스터 조」라는 실체(實體)도 없이 벌인 허망하나 치열한 싸움이었었다.
『참 고운 분이셨지요.』 나선생이 정감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한번은 제 친구들이랑 농장댁에 놀러갔더랬습니다.어머니께서는저희 하나 하나의 손을 다정하게 잡아주시고 잘 익은 사과 한 알씩을 나눠 주셨는데 친구 중의 한 놈이 「야,여자손 잡아봤다!」고 외쳤어요.그때 어머니의 빨개지신 얼굴 모 습을 잊을 수없습니다.나중에 그 놈을 늘씬하게 두들겨 패줬지요.』 나선생의웃음소리가 숲속에 울렸다.
그의 추억담엔 리얼리티가 있었다.어머니는 에로틱한 수줍음을 지닌 귀여운 여인이었다.소년인들 그런 여인을 흠모하지 않겠는가. 8백년이나 살아왔다는 최고령 비자나무는 숲속 으슥한 곳에 있었다. 『키 25미터.가슴둘레 6미터….』 중요문화재처럼 쇠울타리로 테 둘러진 노목 앞에 소개판이 세워져 있다.
6미터.네 사람이 손잡고 에워싸야 할 둘레다.하늘을 가린 가지가 굳건한 노장(老匠)의 팔뚝 같다.엄하되 통이 크고,소박하되 신기(神技)를 지닌 멋진 사나이를 느끼게 한다.
아리영은 손을 모았다.오랜 연륜에의 경배(敬拜)인가,아니면 나무의 품격에 압도된 순순함인가.절로 숙연해진다.
갑자기 소나기가 후드득 내렸으나 겹겹이 뻗치고 싸인 나뭇가지잎새를 뚫고 내리지는 못했다.그 세월의 부피에 새삼 감동했다.
소나기는 곧 그쳤다.
돌아서서 나오다 아리영은 땅 위에 치솟은 비자나무 뿌리에 걸려 휘청거렸다.나선생이 얼른 손잡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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