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달아 높이곰 돋아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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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순식간의 스침이었으나 가슴에 화상(火傷)을 입은 듯 느껴졌다. 아리영은 브래지어를 쓰지 않고 슈미즈만 입었다.
브래지어와 슈미즈.두가닥의 끈이 어깨 위에 교차되어 따로 노는 것이 번거로워서였다.얇고 비치는 옷을 입게 되는 여름철엔 특히 이 두가닥 끈은 흉물이었다.
얄따란 시폰 원피스와 슈미즈 너머 유두(乳頭)를 스쳐간 나선생의 손은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아리영은 자기의 육신이 이렇게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 오히려놀라웠다.
나선생은 묵묵히 운전했다.비자림(榧子林)까지 가는 1시간 넘게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아리영에겐 그런 침묵이 차라리 편했다.뭔가 스스로 정리해야 할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안전벨트를 혼자 매라고 한 사연을 이제야 알 것 같았다.자신의 손이 아리영의 몸에 닿는 것을 삼가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아리영은 남자들의 표정을 읽는 데 익숙했다.아리영의 미모(美貌)앞에서 숱한 남자들이 표정의 행진(行進)을 보였다.
우선 놀란다.그러나 그 다음부터가 각각이었다.놀라고나서 진한관심의 표정을 보내오는 경우와 놀라고나서 되레 무관심한 표정으로 코팅하는 경우가 있었다.
나선생은 좀 달랐다.그의 얼굴은 처음부터 내내 외경심(畏敬心)으로 가득차 있는 것이다.그것은 찬탄의 모습이라기보다 신심(信心)의 표현에 가까웠다.
나선생은 미모를 탐하거나 하는 남자는 결코 아닐 것이다.그런믿음이 아리영을 마음놓이게 해왔다.그런데…,그의 손에 「화상」을 느끼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다 왔습니다.』 나선생이 생각보다 밝은 소리로 침묵을 깼다. 제비나비가 무리지어 날고 있었다.이곳에 꽃나무와 화초가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검푸른 윤기를 지닌 날개와 날씬한 그몸매가 고왔다.
이 숲 속에 2천5백그루나 자라고 있다는 비자나무는 향기로운상록교목(常綠喬木)이다.
두툼한 침처럼 생긴 호생(互生)잎새 사이에 타원형의 파란 열매가 주렁주렁 달려있다.그지없이 싱싱한 향내다.가을에 익으면 구충제(驅蟲劑)로 쓰인다고 한다.비자는 나뭇결이 아름답고 목질이 단단하여 바둑판으로 으뜸이라는 말도 나선생은 했다.
『언젠가는 전기톱을 가진 도둑이 들어와 큰 비자나무의 몸통 일부를 썰어간 사건이 일어났었지요.바둑판을 말들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세상에 그럴 수가!』 비명처럼 소리치자 나선생은길가에 핀 달맞이꽃 한송이를 아리영 머리에 꽂아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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