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택의펜화기행] 왜 펜화를 그리냐고 물으신다면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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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에 먹펜, 22.5X30cm, 1995

펜화가 생소해서인지 ‘펜화를 어떻게 시작하게 됐으며, 왜 건축문화재만 그리느냐’고 묻는 분이 많습니다.

그래픽 디자이너였던 1993년 전 세계 디자이너 중 57명에게 수여된 ‘디자인 앰배서더’가 돼 ‘제1회 세계 로고 디자인 비엔날레’ 초청작가로 유럽을 방문했습니다. 그때 루브르 박물관을 비롯한 여러 곳에서 그림엽서·복제화·캘린더 등 다양한 펜화 복제품을 만나게 됩니다. 주로 건축 문화재를 그린 펜화를 접하며 ‘한국 건축 문화재를 펜화에 담아 세계에 알리면 효과적이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한국을 비롯한 중국과 일본이 수천 년간 붓으로 기록을 하는 동안 유럽에서는 갈대나 깃털로 만든 펜으로 기록을 했습니다. 특히 유럽의 인쇄술이 발달하면서 펜화는 기록화로서 전성기를 맞게 됩니다. 정확한 묘사력으로 세밀한 표현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사진 제판기술이 발달하면서 펜화가 쇠락합니다만 아직도 향수 어린 옛 그림으로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귀국 후 늦은 나이에 펜화가로 직업을 바꾼 뒤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경제적 고생을 하면서도 ‘세계적인 펜화가’가 되고 싶은 욕심에 유럽 펜화를 답습하지 않았습니다. ‘한국적 정서가 담긴 독창적인 펜화 기법’이어야 유럽의 펜화와 경쟁할 수 있다고 보았거든요. 선배도 없고 선생도 없이 독학을 하면서 많은 시행착오가 따랐습니다. 검정 잉크가 빛에 바래 장기 보존이 어려운 것도 몰랐고, 다양한 굵기의 펜촉이 있는 것도 몰라서 세밀한 묘사에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오늘 보여 드리는 불국사 앞 노송 그림이 초기 작품으로 요즈음 그림과 많이 달라 보일 것입니다. 사실 초기 3~4년 동안 소나무를 제대로 그리기 어려워 마음고생이 심했습니다. 펜화 기법도 하나하나 터득하다 보니 지난해 그림과 올해 그림이 다릅니다. 이제는 선조들의 혼이 담긴 건물과 산하의 기운까지 화폭에 담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첫 개인전 때 학고재 우찬규 사장님이 “펜으로 그렸는데 조선 백자의 향기가 납니다”고 했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한국적 펜화를 만드는 데 성공한 셈이니까요.

건축 문화재만 그리는 이유는 시각 문화재 중 건축물이 국가를 대표하는 문화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아름다운 건축 문화재를 500점 이상 펜화에 담아 세계에 널리 자랑하고 싶습니다.

1년에 20여 점 밖에 못 그리지만 명리학의 대가인 조용헌씨와 최고의 관상가인 주선희 교수가 저를 보고 “89세까지 그림을 그리겠다”고 했으니 제 소원은 꼭 이루어질 것입니다.

김영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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