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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라늄 농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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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상식에 속하는 얘기지만 핵폭탄은 원료가 무엇이냐에 따라 플루토늄형과 우라늄형으로 나뉜다. 이 가운데 플루토늄형은 원료 추출 과정에 방사능 기체 방출이 뒤따르게 돼 있어 국제 사회의 감시망을 벗어나기 어렵다.

우라늄형이 비밀 핵개발에 유리한 것 같지만 여기에도 난관이 있다. 자연 상태의 우라늄 광석에는 동위원소 U235가 0.7%밖에 안 들어 있다. 나머지 99.3%는 U238이다. 핵폭탄을 만들려면 U235의 농도를 90% 이상으로 끌어올려야 한다. 이를 위해 사용되는 장치가 원심분리기다. 우라늄 화합물을 고속 회전시키면 가벼운 U235가 안쪽에 모인다. 세탁기를 돌리면 무거운 빨랫감이 바깥쪽으로 밀려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원리는 간단해도 실제로 만드는 기술은 그렇지 않다. 제트기 엔진보다 더 빠른 회전력을 내야 하고, 고도의 진공 기술과 정밀 가공 및 재료 기술이 필요하다. 핵무기 한 개 분량인 농축 우라늄 수십㎏을 만들자면 원심분리기 수만 개가 있어야 한다. 그러니 여간해서는 이런 작업을 자력으로 은밀히 추진하기 힘들다. 파키스탄은 압둘 카디르 칸 박사가 유럽에서 몰래 빼내온 설계도를 바탕으로 우라늄 농축 기술을 축적했다.

2003년 독일의 한 정밀기기업자가 원심분리기의 핵심부품인 알루미늄 관을 북한에 몰래 수출하려다 적발돼 유죄 판결을 받았다. 수입업체는 중국 베이징에 주소지를 둔 북한계 무역회사였다. 이 회사 대표는 국제원자력기구(IAEA) 본부가 있는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근무한 적이 있는 북한 외교관 출신이었다. 이 사건은 미수로 끝났지만 실제 북한은 러시아를 통해 알루미늄 관을 대량 구매한 것으로 미국은 보고 있다. 칸 박사도 북한에 알루미늄 관 견본을 보낸 사실을 시인한다.

우라늄 농축을 둘러싼 북·미 간 기 싸움이 치열하다. 미국은 ‘완전하고 정확하게’ 우라늄 농축 사실을 자백하라고 추궁한다. 그래야만 북한이 원하는 테러 지원국 해제가 가능하다는 입장이다. 국무장관은 ‘인내심의 한계’를 언급했다. 북한은 외무성 담화로 “미국이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우기고 있다”며 역공을 취했다.

북핵 2차 위기가 터진 이래 5년이 넘도록 북·미의 진실 게임은 접점이 없다. 생각 같아선 거짓말 탐지기를 들이대고 대질신문이라도 해서 어느 한쪽의 무릎을 꿇리고 싶다. 그런데 여기 걸린 판돈이 너무나 크다. 북한 체제의 생존과 북·미 관계의 향방, 궁극적으로는 한반도의 지정학적 미래가 이 게임에 달려 있으니 말이다.

예영준 정치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