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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벌레에서 나비가 된 사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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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경남 마산시 월영동의 단칸방. 올해 47세의 지씨는 방바닥에 엎드려 오늘도 한 컷짜리 풍자만화, 즉 카툰(cartoon)을 그린다. 그의 40년 동안의 생활공간이자 작업장인 그 작은 방엔 문만 있지 창이 없다. 그래서 그는 남쪽으로 난 창이 하나 있었으면 하고 바란다. 왜냐하면 사시사철 방 안에서 달을 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달을 반기는 까닭은 늘 그대로인 해와 달리 달은 커졌다 작아졌다, 둥글었다 기울었다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변화하기 때문이다.

#40년을 고치 속의 번데기처럼 살아왔으니 변하는 달 모양마저 부러웠던 게다. 그런 지씨가 말한다. “그대 일상에 평범한 게 다른 사람에게는 정말 소중한 것이 될 수 있다. 그러니 일상의 평범한 것들을 귀하게 여기라”고. 그렇다. 일상의 부대낌, 그 크고 작은 변화와 소란들마저 부러운 이들이 있는 것이다.

#사지가 멀쩡한 남들은 학교도 가고 소풍도 갔지만 그는 40년을 방 안에 갇혀 지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동생을 시켜 빌려온 만화책을 보다가 그것을 베껴 그리는 일뿐이었다. 그렇게 하다 그는 스스로 카툰을 그리게 됐다. 셀 수 없이 많은 점과 짧은 선들을 꼼꼼하게 찍고 그으며 카툰을 그리는 것이야말로 그에겐 유일하게 살아있음을 입증하는 자기 존재 증명이었다. 그리고 그새 모방은 창조가 됐다.

#초등학교 1학년 때 국립 마산결핵병원 부설 저소득층 수용 병실에 몇 달간 입원했다가 퇴원하면서 마산 시내를 한 바퀴 빙 돈 것이 지씨의 세상 구경의 거의 전부다. 하지만 그가 그린 카툰은 참으로 놀랍다. 그 통찰의 힘이 예사롭지 않다. 단칸방에 엎드려 있는 사람이 그린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지난해 7월과 8월에 걸쳐 남산에 있는 서울애니메이션센터에서 그의 첫 작품전시회가 열렸을 때 일반인들은 물론이고 전문가들마저 찬사와 감탄을 그치지 않았다. 결국 그의 카툰 작품들은 본격적으로 세상에 선을 뵌 지 단 9개월 만에 뉴욕으로 진출했다. 이달 31일부터 다음달 26일까지 뉴욕 웨스트 27번가 아트게이트 갤러리에서 전시회를 하게 된 것이다. 그는 여전히 마산 월영동의 단칸방에 엎드려 있지만 그의 카툰은 뉴욕까지 단숨에 날아갔다.

#에드워드 로렌츠라는 기상학자가 말했던가. 베이징에서 나비가 날갯짓을 하면 뉴욕에 허리케인이 불어올 것이라고. 지금 경남 마산 월영동의 단칸방에서 지씨가 무수히 반복해서 찍은 점 하나, 그은 선 하나가 뉴욕에서 작지만 분명한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알에서 깨어난 애벌레는 고치를 짓고 그 안에서 번데기가 되었다가 결국엔 나비가 된다. 40년을 애벌레처럼 기고, 또 고치 속의 번데기처럼 살던 그가 어느새 나비가 되어 날갯짓을 하고 있는 것이다.

#옥상 꼭대기에 올라가서 뛰어내리려고 해도, 올라갈 수조차 없었다는 지씨. 비록 애벌레처럼 방바닥을 기어 다닐 수밖에 없었고 고치 속의 번데기처럼 40년을 숨죽이고 살아온 그였지만 그는 결국 나비가 됐다. 그리고 그의 날갯짓은 뉴욕에서 바람을 일으킨다. 지금은 비록 작은 돌개바람 같겠지만 그의 날갯짓이 계속되면 언젠가는 허리케인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40년을 기다려 애벌레에서 나비가 된 사내, 지현곤씨. 그의 날갯짓에 박수를 보내자. 정말 힘껏!

정진홍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