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Story] “사모님, 갈아타시죠” 무책임한 펀드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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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5월 일본 펀드에 가입한 이자영(42)씨는 얼마 전 단골은행 펀드 판매직원의 전화를 받았다. “가망 없는 일본 펀드 얼른 털고 요즘 뜨는 남미 펀드로 갈아타라”는 권유였다. 이씨는 “일본이 괜찮을 거라고 할 땐 언제고 이제 와 딴소리냐”고 따졌으나 소용없었다. 오히려 “진작 펀드를 옮겨 탄 고객은 손실을 상당 부분 만회했다”는 말에 마음만 심란해졌다. 지난해 300억원에 육박했던 이씨의 일본 펀드 덩치는 지난달 말 20억원대로 쪼그라들었다. 상당수 투자자가 이미 돈을 빼갔다는 얘기다.

현행법상 펀드 덩치가 100억원 미만이면 자산운용사가 고객 동의 없이 펀드를 해지할 수 있다. 100억원도 안 되는 펀드로는 돈을 제대로 굴릴 수 없다는 게 이유다.

고객도 적고 언제든 없애도 되니 운용 성적이 좋을 리 없다. 운용·판매사는 고객을 설득해 다른 펀드로 갈아타라며 ‘돌려 막기’ 일쑤다. 돈도 안 몰리고, 놔두면 관리비용만 들기 때문이다.

이런 펀드 ‘돌려 막기’가 극성을 부리면서 매년 사라지는 펀드가 새로 만들어지는 펀드와 비슷해지기까지 했다. 지난해 해지된 펀드는 1만1156개, 새로 생긴 펀드도 1만1913개에 달했다.

◇넘치는 ‘자투리 펀드’=지난해 3분기 말 현재 한국의 펀드 수는 8662개였다. 일본(2925개)·영국(2125개)은 물론 미국(8021개)도 제치고 세계 1위를 차지했다. 2월 말까지 600여 개가 더 늘어 9329개가 됐다. 이렇게 마구 만들다 보니 국내 펀드 10개 중 6개가 설정액 100억원 미만이다. 만든 지 1년이 넘어 신생 펀드란 핑계를 갖다 붙이기 힘든 펀드만도 전체의 29%(2677개)다.

A운용사 대표는 “자투리 펀드가 워낙 많다 보니 신참 펀드매니저에게 여러 개를 떠안기는 회사도 더러 있다”고 전했다. 이러니 수익률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일반 주식형 펀드의 최근 1년 수익률은 평균 24.93%다. 그러나 순자산액 100억원 미만 펀드는 전체의 84%가 평균 이하다.

◇‘깔아놓고 보자’=자산운용사는 펀드를 굴려 돈을 번다. 수익을 많이 낼수록 운용사 몫도 커진다. 그러나 더 쉬운 방법이 있다. 펀드를 많이 파는 것이다. 일단 펀드를 팔기만 하면 판매사(은행·증권)나 운용사는 걱정할 일이 없다. 수익률이 곤두박질해도 보수는 계속 들어오기 때문이다. 유행 따라 끊임없이 새 펀드가 나오는 이유다. 제로인 펀드투자자문 이재순 이사는 “판매망을 잘 갖춘 회사일수록 이런 유혹에 쉽게 빠진다”고 덧붙였다.

펀드 수가 늘어나는 이유는 또 있다. B운용사의 중견 펀드매니저는 “상품을 많이 깔아놓아야 ‘대박’ 펀드가 나올 확률도 높아진다”고 털어놨다. 이쯤 되면 펀드가 아니라 ‘제비 뽑기’에 가깝다. 제비를 잘못 뽑은 고객은 쪽박 차기 십상이란 얘기다.

◇펀드 남발 규제해야=펀드평가사 제로인에 따르면 세계적 운용사인 아메리칸펀즈의 미국 내 공모 펀드는 42개다. 지난달 말 기준으로 펀드당 덩치가 평균 18조원을 넘는다. 뱅가드그룹의 138개 펀드 평균 순자산액도 6조원대다.

국내 토종 운용사는 이에 비하면 걸음마 단계다. 1위인 미래에셋의 공모 펀드당 순자산액은 3132억원(2월 말 현재)이다. 몇조원짜리 인기 펀드 덕에 평균 금액이 많아졌지만 펀드 수는 164개나 되고 자투리 펀드도 꽤 된다.

2, 3위권인 삼성투신운용(펀드 수 285개)과 한국투신운용(497개)은 더하다. 평균 덩치가 각각 519억원과 189억원이다.

굿모닝신한증권 이계웅 펀드리서치팀장은 “펀드당 순자산액이 100억원 미만인 운용사는 신규 펀드 승인을 제한하는 등의 대책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투자자도 자투리 펀드 여부를 꼼꼼히 따져 가입해야 낭패를 면할 수 있다”고 말했다.

김선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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