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지방선거,무엇이 문제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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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과열.혼탁.인신공격.공약남발….6.27선거 소식을 전하는 신문 헤드라인은 별로 새로운 것이 없다.과거에도 선거 때마다 들어본 표현들이다.
그러나 물론 6.27선거는 과거의 선거와는 다르다.전국선거가아니고 지방자치를 위한 지방선거라는 점이 다르다.그런데 참으로불가사의한 일은 6.27선거가 마치 전국선거같은 인상을 준다는점이다.마치 대통령이라도 뽑는 것같은 분위기 다.후보들은 지방살림을 위한 공약을 발표하고 토론까지도 하지만 입후보자들 뿐만아니라 유권자 대다수는 여당과 야당의 경쟁이나 세대교체같은 전국정치 문제에 더 신경을 쓰는 것같다.
여당후보는 여당후보가 당선돼야만 중앙정부와 협조가 잘 된다고주장한다.물론 이런 주장은 여당을 모독하는 발언이다.왜냐하면 여당은 지방 유권자의 선택을 무시하겠다는 이야기가 되기 때문이다.지방자치의 개념 자체를 부인하는 주장이다.
여당후보가 당선되면「꼭두각시」가 된다고 주장하는 야당측도 지방자치의 기본전제를 부인하기는 마찬가지다.여당에 속하건,야당에속하건 지방유권자들이 선출하는 지방자치단체장은 지방살림을 위해지방유권자를 대표한다는 원칙을 무시한 주장들이 다.세대교체를 내세우는 것도 지방행정보다 전국정치를 염두에 두고 하는 주장인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면 6.27지방선거가 지방행정 이슈에 집중하지 못하고 전국정치 이슈에 매달리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이유는 여러가지가있을 수 있다.그러나 근본적으로는 아직 지방자치제도가 존재하지않는 상태에서 지방자치선거를 해야하는 역설적 상황에 원인이 있다고 본다.
비교적 지방자치가 발달한 구미(歐美)의 여러나라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봉건체제하의 지방영주 또는 귀족세력등을 중심으로 지방의 권력구조가 존재해 왔고,대체로 19세기부터 중앙정부는 이미 현실로 존재하는 지방의 자치권을 제도적으로 인 정함으로써 지방자치제도가 확립되었던 것이다.3권분립이론으로 유명한 몽테스키외는 이미 18세기에 영국의 헌정제도를 높이 평가하면서 특히영국 지방의 중간권력(intermediate powers)구조들의 중요성을 강조■다.이와는 대조적 으로 프랑스는 일찍부터 강력한 중앙집권체제하에서 중앙이 관료조직을 통해 지방을 직접 관장하는 전통을 세웠는데 몽테스키외는 바로 이런 관료적 중앙집권이 프랑스의 전제주의 통치의 원인이라고 믿었다.
우리나라는 영국보다 프랑스에 가깝다고 할 수 있는데 역사적으로 중앙이 인정치 않을 수 없는 지방의 권력구조는 존재하지 않았다.따라서 6.27선거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지방자치제도를가정한 상상력의 연습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이번 선거가 진정한 의미의 지방선거가 되지 못하고 중앙의 정치권으로 흡인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어쩌면 불가피한 현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같다.
그렇다고 역사를 백지화하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는 없는 것이다.오히려 정치발전의 순서는 어떻게 되었건 앞으로 지방자치를 할 수 있는 순간에 와있다는 것만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민주화의 행진을 통해 얻은 귀중한 역사의 기회라고 할 수 있다.선거는 아직 지방화되지 못한 것이 사실이지만 선거의 결과는 지방자치를 가능하게 만들 것이다.그리고 지방자치가 점차 뿌리내리게 되면 지방선거도 그만큼 전국정치의 압박에서 자유롭게 돼 진정한 지방선거로 발전할 수 있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두가지가 있다.
우선 투표를 해야 한다.상상력의 훈련이라도 좋다.많은 사람들은 만족스러운 후보자가 없다고 불평하지만 오히려 그럴수록 투표는 해야 한다.민주주의는 작은 차이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차선을선택할 줄 알 때 가능한 것이다.
둘째로 선거의 결과가 만족스럽지 못하다고 하더라도 지방자치를포기해서는 안된다.왜냐하면 우리들의 생활에 직접 관련되는 결정들은 바로 우리들의 생활에 가까운 곳에서 이뤄져야 하기 때문이다. 지방자치를 한다고 교통.환경.범죄등의 문제들이 우리가 바라는 대로 손쉽게 풀려나간다고 생각하면 큰 잘못이다.어떤 면에서는 우리들의 부담과 책임은 늘어나고 행정적으론 능률이 희생될수도 있다.그러나 지방자치는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공동체에 참여하기 위해선 필수적인 제도다.지방자치제가 없는 민주제도는 뿌리없는 나무와도 같다.
〈사회과학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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