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칼럼>관철동시대 39.國手 조훈현의 재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0면

「이번에야말로」하며 관철동 사람들은 의미심장하게 눈을 반짝이곤 했다.『이번에야말로 조훈현도 사라질 것이다.』 이창호는 91년 여름까지 조훈현의 영토를 거의 대부분 휩쓸었다.曺9단은 특히 주요거점이라할 「왕위」와 「국수」를 이창호에게 내주고 「기성」마저 유창혁에게 점령당한뒤 쇠락의 기운이 완연하더니 8월의 명인전에서는 이창호에게 3대0 스 트레이트로 패해 타이틀을내주고 말았다.관철동은 이 충격적인 패배를 보고 비장감에 사로잡혔다. 曺9단은 15년간 타도의 대상이었다.놀라운 신인이 나타나 독재자 조훈현을 꺾어주기를 염원했다.이제 그일이 이루어졌다. 「황제」조훈현의 하늘은 피빛의 노을로 물들었고 조훈현은 부러진 창을 들고 서산마루에 섰다.옷자락은 찢어져 바람에 나부낀다.기다리던 일이 이루어졌다.한데 그 장면은 정작 통쾌하기는커녕 착잡하기만 했다.
그 옛날 60년대에 김인(金寅)9단은 매년 90% 가까운 파죽의 승률을 보이며 바둑계를 석권했으나 조훈현이란 신인에게 순식간에 몰락했다.이후 사람들은 「김인의 회생」을 목놓아 기다렸으나 그런 기적은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이제 조훈현도 가는구나.』 관철동 사람들은 해가 지면 뒷골목의 소줏집에 모여 씁쓸히 말하곤 했다.『권불십년이라는데 오래했지.그렇지만 이창호는 참 빠르지?』『曺9단도 그건 몰랐을거야.』 조훈현의 몰락은 이제 기정사실이었다.이무렵 15개 기전중그에게 남은 타이 틀은 기왕과 패왕 단 두개였다.
조훈현의 반격은 바로 이 시점에서 소리없이 시작됐다.曺9단은「曺국수」로 불린다.그의 상징이라 할 국수전에서 曺9단은 유창혁.서봉수를 연파하고 도전권을 잡았다.9월28일의 도전기제1국은 이창호의 고향인 전주에서 열렸다.전주는 축제 분위기였다.지방신문엔 전주의 자랑인 이창호의 사진이 대문짝만하게 실렸다.이대국은 생사를 건 도전기가 아니라 이창호의 금의환향을 축하하는기념대국처럼 보였다.그런데 이 판에서 曺9단은 불과 1백41수만에 불계승했다.심상치않은 전조였 으나 프로기사를 포함해 이창호의 최종 승리를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때마침 이창호는 동양증권배 결승에 올라 린하이펑(林海峰)과 자웅을 겨루면서세계로 발을 뻗치기 시작했다.그는 이미 「한국의 이창호」가 아니었다. 예상대로 2국은 이창호의 종반 역전승.3국과 4국을 주고 받은뒤 11월8일 한국기원에서 최종결승전이 벌어졌다.曺9단이 만만치 않은 기세를 보이자 관철동의 어조는 조금씩 바뀌었다. 『부자는 망해도 3년은 가는법이여.』『그래도 기술은 曺9단이 아직 나은 것 아닐까.』 제5국에서 曺9단의 「감각」과 李5단(당시)의 「계산」이 불꽃을 튀기며 용호상박했으나 결과는曺9단의 6집반승.3대2로 曺9단이 「국수」를 탈환했다.가야 마땅한(?) 曺9단이 되돌아왔다.이 사실을 놓고 관철동의 견해는 둘로 갈라졌 다.
『조훈현의 기량은 아직 최고다.그가 끝내기를 보강하면 이창호와의 승부는 5대5이상이다.이 상태가 5년은 갈 것이다.』 『아니다.이창호는 나날이 강해지고 있다.더구나 체력전에서 曺9단은 상대가 안된다.이번의 승리는 회광반조(回光反照)일 따름이다.』 曺9단은 꺼지기 직전의 촛불이 최후로 한번 밝아지듯 그렇게 승리한 것일까.아니었다.이어 벌어진 당시 국내 최대의 기성전도전기(91년12월~92년2월)에서 曺9단은 또한명의 강타자유창혁을 4대2로 꺾고 「기성」마저 되찾았다.이것이 曺9단의 첫번째 「재기」였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