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달아 높이곰 돋아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2면

『아리영씨 편에 보내주신 후한 축의금 감사합니다.미인이 와주셔서 자리가 한결 빛났습니다.』 길례는 동요를 감추려고 애썼다. 『뵙고 싶습니다!』 의례적인 길례의 인사치레를 덮어버리듯 아리영 아버지가 말을 토했다.
『지금 서울집에 있습니다.몇시라도 좋으니 들러주십시오.아리영은 오늘밤 늦게야 돌아올 겁니다.』 어이 없었다.아리영 아버지집은 고사하고 요즘은 아무데도 다닐 처지가 못되었다.
고작해야 동네 시장에나 갈까,돌쟁이 아이를 데리고 어딜 나다닐 수 있단 말인가.새장살이가 따로 없는 것이다.자신의 처지가새삼 딱했다.
『종손 아기 때문에 꼼짝없이 갇혀 있어요.못가뵐 것 같아요.
』 『그럼 제가 댁 가까운 데로 가겠습니다.…말씀 드릴 것이 있습니다.잠깐만이라도 만나주십시오.』 절박한 말투였다.
『한국고대미술관 정원은 어떨까요? 한적하고 공기가 맑으니 아기 삼림욕(森林浴)시키기에도 좋지 않겠습니까? 연당(蓮塘)앞에서 오후 두시에 기다리겠습니다.아기 데리고 나오십시오.』 간결히 할 말만 하고 나서 아리영 아버지는 전화를 일방적으로 끊었다.거절당하지 않기 위해서일 것이다.
한국고대미술관은 길례가 아리영과 서여사랑 같이 「역사대학」강의를 받은 곳이다.아리영 아버지를 처음 만난 곳이기도 하다.삼국시대 유물 중에서도 특히 가야 것을 고루 소장하고 있어 속칭「가야 박물관」이다.주부 대상의 강좌 「역사대학 」을 해마다 두차례 개설하고 있다.
정원도 아름답다.정갈한 흰자작나무 숲과 맑고 향긋한 비자림(榧子林)이 무성하여 그 샛길은 산책로로 삼아져 있다.아닌게 아니라 동해를 삼림욕 시키기에 알맞을 것이다.외교관 출신다운 순발력과 설득력에 길례는 마음이 잡혔다.
동해의 나들이 간식준비를 서둘러 챙기고 가벼운 바지차림으로 유모차를 끌고 나섰다.
하얀 티셔츠에 파스텔 핑크의 슬랙스.역시 파스텔 핑크의 얇은목면(木綿)스카프를 목에 둘렀다.현관을 나서다가 안방으로 도로들어가 선글라스를 꺼내 끼었다.붉은 보랏빛 안경테가 파스텔 핑크의 주조색(主調色)에 썩 잘 어울렸다.아무리 늘려 꼽아도 중년 막바지의 마흔여덟살 주부로는 보이지 않았다.
싱싱하게 무르익은 과일이다.
약속시간보다 일찌감치 가서 전시관을 돌았다.동해에게 가야 유물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알아보든 말든 아이들에겐 최고의 것을 끊임없이 보여줘야 한다.초일급의 미술품,우리 조상의 얼이 담긴 최상급의 유물 등을…. 그것은 길례 나름의 육아법이요,신념이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