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칼럼>관철동시대 33.90년의 세력판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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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0면

90년 새해가 열리자마자 「황제」 조훈현의 영토를 향해 고수들이 수레바퀴처럼 쇄도해 왔다.
선봉은 광주(光州)의 오규철(吳圭喆).의외의 인물이 패왕전에서 서봉수를 꺾고 曺9단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던 것이다.
내기바둑계에서 「호랑이」김철중(金哲中)과 쌍벽이었던 오규철은85년 33세의 나이로 프로가 됐다.18세가 지나 프로가 되면대성은 커녕 소성(小成)도 어렵다는 통설을 깨고 프로 3년만에왕위전 도전자가 되어 실전바둑의 위력을 보여 줬던 인물.그러나曺9단에겐 4대0으로 완패.
90년1월 다시 도전권을 얻은 吳5단(당시 3단)은 『이번만은』하고 이를 악물었으나 결과는 또다시 3대0.이후 오규철은 한계를 뼈저리게 의식하고 광주로 낙향해 이곳의 터줏대감이 됐다. 호남바둑은 조남철(전북부안)김인(전남강진)조훈현(전남영암)이창호(전북전주)4대가 보여주듯 항시 당대의 1인자를 배출해왔다.하지만 지역에 가보면 바둑계는 어느 곳보다 위축되어 있다.
프로들이 모두 서울로 떠난 탓이다.오규철은 대구의 하찬석(河燦錫)8단이 그러했듯 거꾸로 낙향해 실력과 보급 양면에서 무주공산의 왕자가 된 것이다.
오규철이 꺾이자 6월의 왕위전에서 서봉수가 덤벼왔다.徐9단은소년 이창호에게 계속 밀렸으나 5월의 제2기 동양증권배 결승에서 예상을 뒤엎고 이창호를 3-1로 꺾어버렸다.
거의 밟혔다 싶으면 기적같이 다시 일어서는 서봉수에게 갈채가쏟아졌다.「야생의 표범」대신 「잡초류」란 새로운 별명이 徐9단에게 따라붙었다.
그러나 徐9단도 曺9단에겐 4대0패.조훈현왕국의 태양은 여전히 중천에서 절정의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8월엔 이창호가 왔다.「지지않는 소년」이창호는 32연승을 기록하며 명인전에서 서봉수를 꺾고 도전자가 됐다.바둑계는 숨을 죽였다.15세의 이창호는 말할 수 없는 신비감을 토해내고 있었다.「돌부처」「강태공」「우주에서 온 소년」「전생의 고수」등 그어떤 별명도 이 조용하고 어눌한 소년의 내막을 설명해주지 못했다. 신비감과 공포감은 점점 과장됐다.이윽고 이창호는 불가사의가 됐고 많은 프로들의 심리 속에서「무적의 상승군」이 됐다.하나 그 이창호도 曺9단에겐 3대1패.이 패배를 보고 사람들은 말했다. 『이창호는 신이 내렸으나 아직 영험을 발휘할 시기가 못됐다.』 그 다음 KBS.MBC 양대 속기전에서 서능욱(徐能旭)이 결승에 올라 曺9단과 격돌했으나 모두 패퇴했다.
9월이 되자 이창호와 유창혁이 동시에 공격해왔다.전통의 국수전에선 이창호,당시 상금랭킹 1위였던 기성전에선 유창혁.
이번엔 서서히 무르익기 시작한 이창호가 영험을 발휘했다.불사신같던 曺9단은 15세의 이창호에게 3대0 스트레이트로 무너졌다. 국수(國手)에는 상징성이 있다.15년간「조국수」로 불린 조훈현으로부터 이창호는 국수를 떼어버렸다.
조훈현의 철옹성에 비로소 한줄기 석양빛이 어른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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