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소보인 인종학살’ 10주년 … 스켄데라이를 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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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세르비아 대통령이 알바니아계 코소보인에 대해 자행했던 인종 청소가 절정을 이뤘던 1998년의 ‘스켄데라이(SKENDERAJ) 대학살’이 열흘 후면 10주기를 맞는다. 아직도 이곳에는 공포와 슬픔이 무겁고 짙게 깔려 있었다. 26일 대학살의 현장을 찾아 당시 살아남은 사람들이 전하는 코소보 독립의 의미를 들어 봤다.

◇무덤뿐인 마을=“여기서부터는 밝은 표정 금지구역입니다. 그나마 독립 후니깐 좀 달라지기는 했지만….”

이날 오전 코소보 수도 프리슈티나를 떠난 차량이 40분쯤 달렸을 무렵 동승한 안내원이 엄숙한 얼굴로 기자에게 이같이 주의를 줬다. 창밖으로 ‘스켄데라이’라고 적힌 조그만 녹색 표지판이 보였다. 이곳은 90년대 후반 이른바 ‘인종 청소’가 가장 극심했던 곳이다. 당시 스켄데라이는 주민 6만5000여 명 가운데 1100여 명을 잃었다. 코소보 독립군 초대 최고 지도자인 아뎀 야샤리의 집이 있던 프레카즈 마을도 이곳에 있다. 탱크의 공습을 받아 앙상하게 뼈대만 남은 야샤리의 집은 현재 추모사업의 일환으로 복원되고 있다. 추모사업회 직원인 제바트 이메리(34)는 “영화에서도 보기 힘든 참극이었다”며 야샤리 일가 몰살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98년 3월 5일 이른 아침 몰려온 수십 대의 탱크가 무차별 포격을 했다. 아버지대부터 형제가 함께 살던 대가족 야샤리 일가 48명이 한꺼번에 숨졌다. 군인들은 시체를 찾아낸 뒤에도 총격을 가했다고 한다. 코소보 자치 정부가 집 건너편에 만든 야샤리 일가의 무덤 위에는 독립 선언 후 참배객이 눈에 띄게 늘었다.

이메리는 “독립을 맞은 데다 며칠 후면 대학살 10주기여서 추모객 행렬이 이어진다”고 말했다. 프리슈티나에서 온 아브리(41·자영업)는 무덤가에 꽃을 올려놓으며 “야샤리의 희생이 없었다면 오늘의 독립은 없었을 것이다. 힘들게 얻은 자유를 결코 다시 빼앗기지 않겠다”고 힘줘 말했다.

프레카즈를 비롯한 스켄데라이 일대에는 여기저기 무덤이 밭을 이루고 있다. 무덤의 물결을 바라보자 안내원은 “코소보 사람들이 왜 그렇게 독립을 염원하는지, 왜 꼭 이뤄야만 하는지 바로 이 킬링필드가 생생히 전해준다”고 말했다.

◇100년 지나도 안 지워질 상처=스켄데라이에서 차를 몰아 몇 개의 묘지로 둘러싸인 집에 불쑥 찾아 들어갔다. 밝은 표정으로 나오던 50대 여자가 흠칫 놀라면서 “누구냐”고 물었다. “한국에서 온 기자인데 아픈 기억을 좀 이야기해 줄 수 있겠느냐”고 묻자 뒤에 서 있던 딸이 목청을 높였다. “예전에도 코소보 기자들과 얘기를 했는데 그 후로 엄마가 오랫동안 힘들어했다”는 것이다. 그냥 가라고 내쫓는 듯한 손시늉을 했다. “10년이 지났지만 쉽게 지워질 상처는 아닌 듯싶다”고 했더니 안내원은 “100년이 지나도 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세르비아 정부는 이날도 역시 “코소보의 독립 선언은 국제법상 명백한 불법 행위”라며 유엔을 비롯한 국제사회가 이성적인 대처를 해줄 것을 요구했다. 미트로비차 등에선 세르비아인들의 코소보 독립 반대 시위가 이어졌다. 그러나 이날 오후 만난 이미르 가쉬(24·목사)의 이야기는 코소보 사람들의 마음을 대변하고 있었다.

“세르비아 정부가 국제법을 들먹이기에는 스켄데라이 대학살의 상처는 너무 크고 생생하다. 그들은 법을 논하기 이전에 희생을 얘기해야 한다.”

스켄데라이(코소보) 전진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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