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에디터칼럼

권한 행사 쾌감에 빠지지 말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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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인사의 계절입니다. 대통령 취임식에 국회의원 선거까지 겹쳐 2000명 이상을 뽑는 인재시장이 열렸습니다. 이명박 당선인이 정권 초기 선택해야 할 정부 혹은 관련기관 공직자가 1000명, 4월 총선에 나설 국회의원 후보자가 1000명쯤 될 것이라고 해서 나온 계산입니다.

오늘로 한나라당은 1173명 공천신청자에 대한 1차 면접시험을 끝냅니다. 하루 90여 명씩 열하루 동안 강행군이었다죠. 안강민(67) 위원장이 이끄는 11명의 공천심사위원회 회의실. 어떤 관계자는 “팽팽한 긴장감에 터질 듯한 느낌”이라고 묘사했습니다.

▶심사위원: “입법 계획 두 가지만 말씀해 주세요.”

▶신청자: “저는 30년 중국통입니다. 외교통상위원을 하고 싶습니다.”

▶심사위원: “중국어는 어디서 배웠나요.”

▶신청자: “잘 못합니다.”

▶심사위원: “중국통이 중국어를 못합니까.”

▶신청자: “…”

동문서답으로 한 번 스텝이 꼬이자 의표를 찌르는 질문이 날아왔고 얼떨결에 털어놓은 진실이 민망한 장면을 낳았습니다.

국회의원 공천 심사는 한 인간의 인생을 전면적으로 들여다보는 인격 경연장입니다. 참가자 입장에선 그 전까지 인생을 발가벗겨 드러내는 검투사의 격투장이고요. 공천신청자들은 총선 인재시장에 자기를 내놓겠다는 정치상품들입니다. 각 정치상품엔 무슨 원산지 증명처럼 당적 확인서와 자기 소개서, 세금납부·병역이행·범죄기록 증명서를 부착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 누구나 볼 수 있게 말입니다. 검증의 칼은 그 다음에 들어오죠. 정치시장에 나오는 사람은 이처럼 전 인격과 전 인생을 걸어야 합니다. 개인에서 공인으로의 전환엔 위험이 따릅니다. 자칫 수치와 모욕을 당하거나 패가망신할지 모르죠.

2008년 정치시장에선 ‘의정활동 계획서’라는 증명서가 하나 더 추가됐습니다. A4용지 3쪽 분량에 ‘의정활동 목표’ ‘상임위 입법활동 계획’ ‘국정현안 과제’ ‘의정연계 활동’을 꼼꼼하게 적어내는 거죠. 누가 대신 써줬는지, 과연 자기 경험에서 우러나온 건지 하는 것들은 공천심사위원들이 면접에서 가려냅니다.

의정활동 계획서는 매니페스토 활동가인 김영래(62) 아주대 교수가 공천심사위원이 되면서 제안한 겁니다. 의정활동 계획서는 매니페스토 실천계획서랍니다.

매니페스토는 ‘선언’이자 ‘약속’이며 ‘이행’이면서 ‘신뢰’입니다.

공직은 선언 아닐까요. 이기적인 인간이 하늘의 소명, 혹은 양심의 명령에 따라 “나를 위한 삶보다 남을 위한 삶을 살겠다”고 소리 높여 복명하는 것 말입니다. 공직은 약속 아닐까요. 개인이 부자고 공공은 가난한 시대, 사적 이윤은 넘치는데 공적 인프라는 부족한 세상에서 ‘공익에의 헌신’을 다짐하는 것 말입니다. 공직은 이행 아닐까요. 말잔치, 토론 잔치는 그만 하고 앞으로 4~5년 정교한 시간계획에 따라 차근차근 실적을 쌓아가는 로마군단 같은 실천력 말입니다. 공직은 신뢰 아닐까요. 사욕에 눈멀지 않고 권한행사의 쾌감에 빠져들지 않으며 초심이 흔들리지 않아 국민한테 얻게 되는 믿음 말입니다.

박재승(69) 위원장이 이끄는 통합민주당 공천심사위는 다음 주부터 본격 가동합니다. 한나라당처럼 면접시험에 들어가는 거지요. 당내 세력과 계파정치에 휘둘리지 않을 것이란 기대 때문에 ‘공포의 외인구단’으로 불린다죠. 민주당은 아마 한나라당보다 엄격할 겁니다. 대선에서 뼈저린 심판을 받았으니까요.

공직과 죽음엔 또 어떤 공통점이 있을까요. 거기에서는 실존적 엄숙함이 느껴집니다. 이순신 장군의 삶이 연상되지 않습니까.

공직 인재시장에서 선택될 명예로운 2000명 정치상품들에게 이런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공직의 실패는 죽음이다.” “죽기를 각오하고 공직을 수행하라.”

전영기 정치부문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