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mily] 우리 상상력에 ‘태클’ 걸면 싫어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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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에 출품된 이탈리아 레지오 에밀리아시 어린이들의 작품. 신발에 대해 탐구하는 과정에서 신발상자를 모아 자기들 키보다 큰 공룡을 다함께 만들었다.

“우리는 눈·노래·그림으로도 말할 수 있지? 오늘 마음껏 말해보고, 마음껏 놀아보자.”

26일 오전 서울 순화동 국제교류재단, 레지오 에밀리아 한국 순회 전시회에 맞춰 어린이 워크숍이 열렸다. 부모 손에 이끌려 온 만 3∼5세 아이 24명을 위해 이날 마련된 프로그램은 두 가지 ^나무 관절인형을 하나씩 갖고 색한지와 철사를 이용해 자기만의 인형으로 꾸민 뒤 친구들의 인형과 어울려 놀기 ^자갈·나사·파스타 등 자잘한 물건을 페트병·유리병 등에 넣고 흔들어 나만의 악기를 만든 뒤 합주하기다. 놀이교육 시작 전에 교사가 당부한다. “어린이들이 혼자서도 잘할 수 있으니 부모님들은 걱정 마시고 사진을 찍어 주시거나 전시회를 보고 오시라”고. 제각각 독립된 세계를 갖고 있는 아이들이 세상에 어떻게 반응하고, 어떻게 자기 세계를 익혀 나가는지 어른은 그저 끈기 있게 지켜보면서 막히는 부분만 뚫어 주라는 얘기다.

레지오 에밀리아는 이탈리아 북부 인구 14만 명의 소도시다. 디자인·창의산업이 발달한 이곳이 50여 년 역사에 걸쳐 다듬은 유아 교육 방식은 ‘레지오 에밀리아’라는 일반명사로 통칭될 정도가 됐다. 아이는 엄마가 집에서 키우는 거라는 인식이 당연할 무렵인 1969년 이 도시의 부모들은 0∼6세 유아를 시에 위탁해 키우기 시작했다. 교구나 매뉴얼도 따로 없이 아이들이 공동생활을 하며 원하는 주제에 따라 장기간의 ‘탐구생활’을 한다. 예컨대 신발공방과 가게가 밀집한 거리를 거닐며 관찰하고, 다 함께 하이힐 미끄럼틀 등 신발을 모티브로 한 놀이터를 설계한다. 버려진 신발 상자를 이용해 거대한 공룡을 만들어보기도 한다. 소리에 대한 관심으로 주변 물체를 이용해 이런저런 소리를 내고, 음악을 들은 뒤 그 느낌을 큰 종이에 다함께 추상화로 그리기도 한다.

이날 워크숍도 이 같은 원리에 따라 진행됐다. 서영이는 좋아하는 분홍색으로 인형에 치마를 입히고 보라색 웃옷을 입혔다. 빨간 사인펜으로 얼굴을 그렸는데 우는 얼굴이다. “발레 하는 친군데 밥 안 먹는다고 혼나서”라고 설명한다.

아이들이 아무 생각 없이 종이를 골라 인형을 꾸미는 게 아니라 인형에 정체성을 불어넣고, 그 인형만의 이야기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준성이는 분유통에 자갈을 넣거나 페트병에 나사를 한 줌 담아 흔들어 보인다. 자신만의 악기에서 무슨 소리가 나는지, 그 느낌을 종이에 그려보라고 교사가 권하자, 색연필로 선을 죽죽 긋는다. “비 오는 소리”란다.

마지막에는 아이들이 저마다 인형을 들고 다른 친구들에게 소개했고, 만든 악기로 박자를 맞추며 합주를 해 보였다. 02-416-2581.

글=권근영 기자, 사진=김성룡 기자

떠 먹여주는 ‘계단식 교육법’그만 …
자연스럽게 오감 발달시켜야

20개월엔 이것을, 25개월엔 이렇게….

전시장 입구의 조형물. 역시 이탈리아 어린이들이 색과 형태를 탐구하면서 빚고 칠해 쌓아 올린 것이다.

흔히들 유아교육을 이렇게 접근한다. 아이가 무난히 각 단계를 밟아나가면 안심하고, 옆집 아이보다 뒤떨어지면 조바심내기도 한다. 그러나 레지오 에밀리아 교육 전문가들은 “이 같은 발달이론에 따른 과정 편제는 평등주의적이며 공급자 중심적”이라고 비판한다. 교사도, 부모도 만들어진 과정을 그대로 따라가면 되기 때문에 편리하지만 아이 입장에서는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게 된다. 안 해도 어른들이 알아서 떠먹여주기 때문이다.

경기도 안산 서원유치원 이정자 원장은 “언어 발달이 빠른 아이가 똑똑하다고 생각할 게 아니다. 언어 이전의 감각을 살릴 수 있도록, 마음껏 시행착오를 할 수 있도록 신뢰를 보여줘야 한다”고 말한다.

가령 색깔을 주제 삼아 한 학기를 보낼 수도 있다. 이 유치원에서는 처음에 검은 도화지를 나눠주자 아이들은 거기서 색을 찾으려 애썼다고 한다. 검은 바탕에 크레파스로 색칠하며 색을 드러내고자 했다. 수채물감으로 이 색, 저 색 섞어보기도 했다. 아이들이 만든 색으로 봄의 느낌, 여름의 느낌을 다 함께 추상화로 표현하기도 했다.

오문자 한국레지오교육협회장은 “정보를 주며 이를 흡수하게 할 것이 아니라 느리더라도 스스로 받아들이고 주도하게 해 나가야 오감을 발달시키며 주변 환경과 관계를 맺을 수 있다”고 조언했다.

권근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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