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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왕’ 조용필의 실용정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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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내내 당당했던 그가 계면쩍어하던 대목이 재미있었다. 히트곡 ‘킬리만자로의 표범’에 관한 것이다. 그는 “21세기가 간절히 나를 원했기 때문이야” 부분을 읊을 때 “너무 찔린다”고 했다. 올해 쉰여덟인 그가 21세기를 운운하는 게 쑥스럽다는 자성(自省) 아닌 자성이었다. 이순을 앞둔 그의 여유가 느껴졌다.

그날 조용필은 기억에 남는 말을 많이 했다. 그의 오늘을 만든 건 모방이라고 했다. 물론 단순한 베끼기는 아니다. 경기도 화성에서 태어난 소년 조용필이 음악을 접한 건 집에 있던 제니스 라디오를 통해서였다. 소년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팝송에 매료돼 하모니카를 불고, 기타도 배웠다. 그때의 목소리는 당연히 미성이었다.

1976년 ‘돌아와요 부산항에’로 스타덤에 올랐다가 대마초 사건으로 활동이 막힌 시절, 그는 ‘세일링’으로 유명한 영국가수 로드 스튜어트의 탁한 목소리가 부러웠다고 했다. 그는 교재로 판소리를 택했다. 박동진 명창 등 국악인을 사사하며 목을 단련시켰다. 80년 나온 1집 앨범에 수록된 ‘한오백년’을 익히기 위해 그 민요가 실린 음반을 10장 넘게 구해 듣고 또 듣고, 부르고 또 불렀다고 했다. 대중가요와 국악의 성공적 접목이란 평을 받는 ‘한오백년’은 그런 담금질 끝에 나왔다.

“명산대천을 찾아 다니며 득음을 했다는 건 신화입니다. 노래라곤 팝송밖에 몰랐거든요. 국악·록·발라드·트로트 등등, 다양한 창법은 남의 것을 흉내 내면서 내 것으로 만든 거지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몰입이다. 예컨대 그는 지금도 라디오를 켜면 미군방송 AFN과 클래식·국악만 듣는다. 최신 트렌드와 전통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다. 또 좋은 가사를 위해 시집을 즐겨 읽는다. ‘시인의 감수성’에 영감을 받고, 따라 할 게 없는지 찾고 싶어서다.

조용필의 40년은 지속적 모방을 통한 새로운 창조로 요약될 것 같다. 안정된 현실에 머물지 않는 무한 도전이 조용필의 힘임을 실감할 수 있었다. ‘직업이 가수’라며 노래방에서도 자기 노래를 반복하는 그는 분명 프로였다. 2005년 체력에 한계를 느껴 하루 서너 갑 피우던 담배를 단박에 끊고, 이후 담뱃갑에 손 한 번 댄 적이 없다는 대목에선 ‘지독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최근 실용주의가 화두다. 최고를 향한 열정과 부단한 정진으로 똘똘 뭉친 조용필이 실용주의의 요체를 보여주는 게 아닐까 싶다. 새로운 사운드에 대한 끝없는 탐색, 기존의 명성에 안주하지 않으려는 ‘아웃사이더’ 시각이 50대 가객 조용필을 ‘영원한 오빠’로 끌어올린 것 같다.

한국사에서 실용 하면 바로 떠오르는 게 실학이다. 최근 다산연구소가 보내온 e-메일에서 장승구 세명대 교수는 실학의 핵심을 ‘아웃사이더’와 ‘몰입’으로 압축했다. 양반의 허위를 비웃은 박지원, 경제 제일주의를 외친 박제가, 서학(西學)에 몰두했던 정약용 등 실학자는 기득권에 물들지 않는 열정적 아웃사이더였기에 새로운 대안을 모색할 수 있었다고 한다.

실학은 단순한 실용적 사고가 아닌 창조적 사고라는 것이다. 실용주의 하면 눈앞의 실적과 성과만 떠올리는 우리의 단견을 교정해 준다. 한국 사회가 아웃사이더를 품어줄 때 21세기 창조성의 시대가 꽃필 것이라는 장 교수의 주장에 십분 동의한다. 조용필의 40년은 그것의 일단을 보여 주었다. 우리 모두 너무 조급해하지 말자.

박정호 문화스포츠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