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악단, 한국서 ‘사랑의 레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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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맹학교 강재현(右)군이 맘프레드 헤벌라인에게 튜바 연주법을 배우고 있다.

국립서울맹학교 고등부 2학년인 이인제(17)군은 트럼펫을 분다. 입술이 없이 태어나 8살 때 입술 이식 수술을 한 그는 근육 강화 훈련을 위해 6년 전 맹학교 합주단에 들어왔다. 이 군은 “태어날 때부터 눈이 안 보이니 귀가 예민해요. 한번 들으면 무슨 음인지 정확하게 아니까 오히려 편한 것도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같은 학교 중등부 1학년 강재현(13) 군은 튜바를 연주한다. 역시 눈이 안 보이는 강 군은 “튜바를 연주하면 마음이 편해진다”며 “이상재 선배님(맹학교 출신 클라리넷 연주가) 같은 전문 연주자가 되고 싶다”고 자신의 꿈을 내비쳤다.

이 군과 강 군을 비롯한 맹학교 합주단 학생 20명은 16일 아름누리 음악당 무대에 섰다. 독일의 금관악기 5중주단인 ‘하모닉 브라스’ 단원들로부터 강습을 받기 위해서다. 1991년 결성된 하모닉 브라스는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원곡을 쉽게 편곡해 소개하는 악단으로 유명하다. 전 세계 독일문화원을 순회하며 현지 학생들에게 음악을 가르치는 활동도 꾸준히 펴고 있다. 한국에 오면서 “뜻 깊은 음악교실을 열고 싶다”고 요청해 초청자인 이건그룹의 주선으로 맹학교 합주단을 만난 것이다.

세계적인 연주자에게 레슨을 받는 게 처음이다보니 학생들은 몹시 떨리는 표정들이었다. 이 군은 잔뜩 긴장한 얼굴로 ‘아름다운 나의 벗’을 연주했다. 트럼펫 주자 유르겐 그뢰블레너가 “입술 주변에 좀 더 힘을 줘라. 고무줄이 당겨지듯 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강 군은 튜바 주자 맘프레드 헤벌라인의 지도를 받았다. “뜨거운 걸 입에 넣어서 입이 붙어버린 느낌으로 불어야 한다”는 조언을 들은 강 군이 다시 음악을 연주하자 “참 잘했다”며 박수가 터져나왔다.

다른 합주단원들도 일대 일 지도를 받았다. 강약을 살려 연주하는 법, 숨을 길게 쉬는 법을 집중적으로 연습했다. 한 시간 가량의 강습이 끝나자 학생들은 “지금까지 배우지 못한 걸 배웠다” “부족한 부분을 알았으니 더 열심히 연습해야겠다”며 밝은 표정을 지었다.

이 악단 리더인 그뢰블레너는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을 나눠주고 싶어서 이 자리에 섰다”며 “장애 속에서 즐겁게 음악을 배우는 모습에 감동을 받았다”고 소감을 밝혔다. 트럼펫 주자인 한스 젤너는 “이들의 연주는 음악적으로도 훌륭하다”며 “학생들과 지도교사 모두에게 존경의 뜻을 보내고 싶다”고 말했다.

지도교사인 최영식(75)씨는 “세계적인 연주자의 연주를 이렇게 가까이서 듣는 것 만으로도 훌륭한 교육”이라며 “‘음’이 곧 ‘빛’인 시각장애 학생들에게 이런 기회는 영광스러운 일”이라고 말했다. 최 교사는 맹학교 합주단을 35년 째 혼자서 이끌어 왔다.

맹학교 합주단은 마지막으로 최 교사의 호루라기 지휘에 맞춰 ‘아이다’를 연주했다. 이들의 연주에 감동받은 한스 젤너는 자신이 아끼는 트럼펫을 현장에서 기증했다. 제18회 이건음악회에 초청돼 처음 한국을 찾은 하모닉 브라스는 19일 대구 문화예술회관 공연을 마치고 독일로 돌아간다.

한애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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