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창호의 Winning Golf <25> 규칙은 자신에게 더 가혹하게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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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호 16면

“김형, 이거 어떻게 하지. 여기 맨땅이야. 공을 좀 옮길게.”

동반자는 동의하지 않았는데도 말을 꺼낸 상대방은 이미 공을 집어들고 리플레이스할 장소를 찾고 있다. 이럴 때는 참 대책이 안 선다. 잘 아는 처지에 냉정하게 ‘규칙 위반’ 운운할 수도 없고. 결국은 “네, 그렇게 하세요”라고밖에 할 말이 없는 것이다. 몇 홀 전 그보다 더 안 좋은 라이에서 샷을 하고 만 동반자라면 속이 상할 수도 있다.

18홀 라운드를 하다 보면 정말 여러 상황에 처하게 된다. 나름대로 규칙을 잘 지키려고 노력하는 골퍼에게는 동반자의 규칙 위반이 너무도 선명하게 눈에 들어오곤 한다. 그러다가 규칙 적용에 이견이 생기면 설전으로 확대되고 급기야 라운드를 하다 말고 골프 관련 경기단체 등으로 전화를 해 문의하는 경우도 있다.

가장 까다로운 경우는 한 골퍼가 특정한 동반자에게 “이거 어떡하느냐”고 읍소형 질문을 할 때다. 그 동반자는 네 명 가운데 골프 규칙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일 때가 많다. 아니면 그날 모임의 최고 연장자이거나. 따라서 그의 ‘처분’은 규칙 위반 여부를 판가름하거나 라운드 진행의 룰을 결정하는 잣대가 될 수도 있다.

유리한 처분을 받아낸 골퍼는 누가 문제를 제기해도 “아무개가 그렇게 해도 된다고 했다”며 당당하게 ‘면죄부’를 꺼내 보일 수 있다. 특히 그날 ‘모시는’ 입장에서는 상대방의 모든 행위가 ‘만사 OK’. “대회도 아닌데요. 좀 더 좋은 곳에 놓고 치세요. 이만큼 더…. 아뇨, 그냥 페어웨이 쪽으로 드롭하세요.” 집어던진다고 다 드롭인가.

하지만 이렇게 되면 골프의 기본 정신은 오간 데가 없게 되고 골퍼의 진정성마저 의심받게 된다. 그러므로 정통파 골퍼라면 동반자가 먼저 호의를 베풀더라도 그 뜻은 고맙게 받되 오히려 규칙을 더 철저하게 지켜낼 수 있어야 한다. 한 샷의 유혹에 빠지게 되면 그날의 어떤 성과물도 그 빛이 퇴색하고 만다.

필자의 한 선배는 동반자 세 명이 모두 모르고 있는 자신의 규칙 위반을 스스로 시인하고 나설 때가 많다. 예를 들면 해저드 내에 있는 공을 쳐내기에 앞서 자신의 볼인지 확인하려다 풀숲을 건드려서 공 위치가 바뀐 경우다.

이 경우 당사자가 아니고서는 풀 속에서 공이 움직이는 것을 제3자가 알기는 어렵다. 공 주인이 입을 꾹 다물어 버리면 그냥 지나가는 일이 되고 말 것이다. 평소 워낙 철두철미하게 규칙을 지키는 분이기 때문에 그와 라운드를 해본 사람은 그가 규칙을 위반하리라고는 전혀 의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는 가혹할 만큼 자신의 규칙 위반을 고백한다. 때로는 아주 철저하게 규칙을 활용해 보다 유리한 상황에서 다음 샷을 할 기회를 만들기도 한다. 이 때문에 그와 라운드할 때는 ‘규칙 분쟁’이 거의 없다. 그뿐 아니라 그의 엄격한 규칙 적용은 상대방의 읍소형 규칙 질문을 사전에 차단해 버리는 효과가 있다.

그러나 그는 상대방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큰 배포도 함께 지녔다. 자신에게는 가혹하면서도 상대방의 난처한 상황에 대해서는 관대하다. 그러기에 그는 간혹 스코어상으로는 다른 동반자에게 몇 타 뒤지는 일이 더러 있지만 본질적인 골프 게임에서는 결코 지는 법이 없다. 당연한 일이다. <브리즈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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