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비서실>190.박철언의 월계수회 무대뒤서 영향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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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88년 우리 현실에서 정치판을 짜는 여권의 3대 軸은 집권여당인 민정당과 정보 총본산인 안기부,그리고 권력의 핵 청와대였다.그런데 13대 전국구의원 공천과정에서는 두 축인 당과 안기부가 의사결정 과정에서 소외돼 발표직전 청와대로부 터 공천자명단을 통보받아야만 했던 처지였다.
이는 6共초 권력이 청와대라는 하나의 축으로 집중돼 있었음을말해준다.권력의 과도한 청와대 집중도 문제지만 청와대로 모인 권력이 또다시 청와대 내의 특정인에게 몰려있었던 것 역시 문제였다.물론 특정인은 盧泰愚대통령이 아니라 朴哲彦 정책보좌관이었다. 청와대에서 정치관련 업무를 담당하는 부서는 정무비서실이다.대통령의 통치행위가 정치와 무관한게 없기에 정무수석비서관은 수석비서관중에서도 수석(의전상 서열은 의전수석이 더 빠르지만 실질적으로는 정무수석이 더 높다)이며,대통령의 신임 역시 가장돈독하게 마련이다.
6共 초대 정무수석인 崔秉烈수석 역시 마찬가지로 盧대통령의 각별한 신임을 받고 있었다.그는 盧후보시절 당내 1급 참모로 대통령선거 승리를 이끌어내는데 공헌한 민간인출신 1등 창업공신.「5共 청산」공약을 만들어내고 동시에 이.취임식 에 반대했던그이기에 全斗煥대통령이 정무수석 임명을 반대했지만 끝내 정무수석으로 취임할 수 있었던 것도 盧대통령의 각별한 신임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런데 이런 崔수석 보다 朴보좌관이 사실상 전국구의원 공천을요리했다는 것이 6共초 권력구조의 한 단면이다.다시 말해 공식적인 의사결정 절차보다 비공식적인 의사결정 구조가 항상 더 큰영향력을 가졌으며,대개의 경우 비공식적 의사결 정의 길목에는 朴哲彦이라는 인물이 숨어있었던 것이다.
朴씨는 이에대해 평소『나는 당시만 해도 북방정책에 전력을 쏟고 있었기에 국내정치 문제에 거의 관여하지 않았다』며 부인해왔다.그는 최근 서울구치소에서「청와대 비서실」기사를 읽고 변호인을 통해 이같은 자신의 무관함을 재차 전해왔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는 당시의 정황은 그의 절대적 영향력을 확인해준다.
청와대 관계자 X씨는 당시 청와대에서 이뤄진 공천결정과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억했다.『전국구 공천작업은 안기부나 당.청와대(민정수석비서실의 인사자료)등에서 필요한 자료를 받아 盧대통령과 洪性澈비서실장,崔수석,朴보좌관등 주로 네사 람이 최종낙점하는 방식으로 진행됐지요.그런데 그런 자리에서는 주로 盧대통령과 崔수석이 얘기를 많이 했습니다.대통령이 지시하고 정무수석이 의견을 말하는 정도예요.洪비서실장이야 원래 웃분의 의견이라면 이견없이 따르는 사람이었으니까 자신 이 꼭 챙겨줘야할 사람외에는 가타부타 말이 적었죠.』 이어 X씨는『그런데 이상한 것은 평소 자기 주장이 강한 朴보좌관이 별로 말이 없다는 거예요』라고 의문을 제기했다.그리고 그는 그 의문에 대해『朴보좌관은이미 盧대통령과 얘기가 끝났기에 말할 필요가 없었던 거죠』라고自答했다.
또다른 당시 청와대 관계자 Z씨는 보다 구체적인 朴보좌관의 영향력 행사법을 설명해줬다.『朴보좌관은 겉으로 관계하지 않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공천을 좌우할수 있었죠.盧대통령과 독대하는 방식을 이용했기 때문이죠.독대해 사람을 추천하고 메모를 건네는거예요.그는 공천과 관련해서는 서식을 갖춘 보고서를 내기보다 몇사람의 이름을 적은 간단한 메모지를 사용했죠.그러면 대통령은공식회의를 소집해 그 메모에 적힌 사람의 이름을 불러주면서「선거때 고생 많았던 사람이니까 이번 공천에 꼭 넣어야 됩니다」라고 지시를 하는 거예요.특별히 문제가 없는한 대통령의 한마디면곧 당선이나 마찬가지죠.특히「선거때 고생 많았다」는 얘기를 듣고 누가 대통령에게 따져 물을 수도 없잖아요.
Z씨는 朴보좌관의 독대방식에 대해서도 『보통 주2회 정도의 공식 독대보고가 있었습니다.그러나 그런 보고보다 중요한 것은 저녁시간에 슬며시 청와대 본관을 다녀가는 深夜독대방식이죠』라고설명했다.그는 이어『청와대는 창살없는 감옥이라고 들 하잖아요.
청와대 주인이 되면 바깥나들이가 자유롭지 못해 그런거죠.물론 낮에는 일정이 빡빡하니 감옥이고 뭐고 느낄 여유도 없어요.그런데 보통 대통령의 일정은 늦어도 오후9시 이전에 끝나게 돼있어요.9시 저녁뉴스를 시청하고는 잠자리 에 들라는 얘기죠.하지만나이많은 대통령내외에게는 밤이 길고 적적하게 느껴지게 마련이죠.그럴때 아끼는 친인척인 朴보좌관같은 사람이 찾아와 이런 저런얘기를 같이 나누면 얼마나 즐겁겠어요.
결론적으로「권력은 공간」,권력에 가까울 수 있다는 점은 곧 힘이었다.朴보좌관은 절대적 신임과 친인척관계를 이용한 청와대 심야 무상출입의 특권으로 권력에 가까이 갈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朴보좌관이 자신의 생각대로 대통령을 움직여갈 수 있었던것은 대통령내외를 충분히 설득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그러면 설득력이라는 朴보좌관의 능력은 어디서 나온 것인가.그의 능력 역시 비공식적인 기구에 많이 의존했다는 점은 흥 미롭다.
앞서 다루었듯이 朴보좌관은 당초 청와대내에「비서실」「경호실」외에 이와 나란히「정책실」을 두고 자신이 이를 총괄하는 정책실장을 맡고자 했다.이 구상에 따를 경우 비서실은 말 그대로 「비서」,다시 말해 의전적인 수발업무만 담당하고 실 제 대통령의참모기능은 정책실이 맡게돼 모든 힘은 자연 정책실로 집중되게 마련이었다.물론 李春九취임준비위원장등의 결사반대로 이 안은 무산됐다. 그런데 朴보좌관은 자신을 위해 만든 수석비서관급 자리인 정책보좌관으로 청와대에 입성해 조직.편제와 무관하게 사실상거의 정책실장과 같은 역할을 했다는 것이 당시 청와대관계자들의증언이다.
청와대 동별관 3층에 자리잡은 정책보좌관실은 4개 팀으로 구성돼 있었다.소속원들은 모두 朴보좌관이 5共시절부터 고르고 골라온 각부처의 엘리트들.특히 핵심적인 인물들은 朴보좌관이 안기부장특보시절 안기부내에 별도로 운영했던 별동대 멤 버들이었다.
「정책기획반」은 총괄.기획담당으로 책임자는 朴보좌관의 검찰후배인 李모검사.당시 30대 후반의 그는 안기부특보팀에 있다 朴보좌관을 따라 청와대로 옮겨온 측근으로,朴보좌관이 정무장관으로청와대를 떠나자 다시 안기부로 돌아갔다 6共 후 반에 또다시 청와대 비서관으로 돌아와 근무했다.
「조사연구반」은 정책기획반과 같이 국내문제를 다루었으며,반장은 법제처출신 朴모비서관.40대 초반이었던 그 역시 朴보좌관의서울大법대 후배로 일찌감치 발탁돼 朴보좌관의 분신처럼 함께 자리를 옮겨가며 근무해왔다.
***보좌관실 4팀 가동 나머지「정책연구1반」「정책연구2반」은 이름만 들어선 뭘 하는 곳인지 알 수 없다.이들은 6共의 역점사업인 북방정책의 밀명을 받드는 팀으로 1반은 주로 소련.
동구권 전반을 맡았고,2반은 북한문제를 전담했다.
1반 반장은 廉모비서관으로 안기부출신이며,2반 반장은 姜모비서관으로 외무부출신이다.안기부출신이 동구권을 맡고,외무부출신이북한관계를 전담한다는게 뭔가 뒤바뀐 느낌이지만 朴보좌관은 그렇게 역할을 맡겼다.
그런데 이같이 드러난 공식적인 정책보좌관실팀이 朴보좌관 휘하의 일부에 불과했다는 점이다.朴보좌관은 능력발휘를 위해 비공식적인 보좌를 더 필요로 했다.
朴보좌관과 가까웠던 W씨는『朴보좌관이 안기부특보에서 청와대 정책보좌관으로 옮겨가면서 데리고 간 사람은 손가락에 꼽힐 정도에 불과했습니다.나머지는 안기부에 그냥 남아 있었어요.대표적인경우가 姜在涉검사(현 민자당의원)죠.물론 그는 나중에 전국구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하지만 나머지 안기부에 남았던 朴哲彦팀들은 안기부에 있으면서 여전히 朴보좌관을 위해 일했습니다.이들은 무슨 일이 생기면 아예 안기부안가(주로 삼청동안가)를 하나 차지하고 모여 같이 일하곤 했습니다』라 고 말했다.
朴보좌관은 이같은 안기부의 비공식적 조직까지 휘하에 거느림으로써 자신의 힘에 어울리는 능력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이다.그러니 6共의 역점과제인 북방정책을 전담하면서도 국내정치까지 요리할 여유가 있었던 것이다.
〈吳炳祥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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