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책읽기] 언어는 진화의 산물이자 신사고의 열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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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스티븐 핀커-캐나다 몬트리올에서 태어나 맥길 대학에서 시지각과 심리학을 공부했다. 하버드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MIT의 인지신경과학센터의 소장으로 일하면서 언어심리학과 진화론으로 관심영역을 넓혔다. 현재 하버드대학 심리학과 교수이다. 『언어본능』(1994) 이후 여러 저술의 대중적 성공으로 널리 알려졌고 2004년 타임 지 선정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에 선정되었다.

새 책을 낼 때마다 화제를 불러일으킨 진화론적 언어심리학자 스티븐 핀커의 신간이 나왔다. 5년 전 『블랭크 슬레이트』(『빈 서판』으로 번역 소개되었다)에서 남자와 여자의 차이는 진화의 결과로서 타고난 것이라고 주장했다가 페미니스트들의 호된 비판을 받았던 그는 이 책에서 좀 더 종합적인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은 언어와 사고의 관계에 대해 다룬다. 부제 ‘인간본성에 이르는 창으로서의 언어’가 말하는 대로, 언어를 통해 인간이 지닌 사고의 본질을 알 수 있다는 것이 핀커의 주장이다. 빈 잔에 물을 붓는 장면을 예로 들어보자. 한 사람은 잔에 물을 채운다고 하고 다른 한 사람은 잔에 물을 붓는다고 말한다. 앞의 사람은 잔의 상태에 대해 말하고 있고, 또 한 사람은 물의 움직임에 대해 말하고 있다. 차에 가방을 싣는다고 말하는 것과 가방을 차에 싣는다고 어순을 달리해 말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말하는 사람의 관심이 차의 공간에 있는가 아니면 가방의 위치 이동에 있는가를 보여준다. 이러한 예를 통해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의 두뇌 속에 기본 사양으로 깔려 있는 공간, 시간, 그리고 사물들의 관계에 대한 지각이 언어의 사용방식을 통해 드러난다는 것이다. 일견 상식적인 이 주장의 속내를 보면 간단치가 않다.

인간의 사고가 언어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는 생각은 지난 100년간에 걸쳐 널리 퍼졌다. 니체는 인간의 사고가 언어의 감옥에 갇혀 있다고 했고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선 침묵하라고 했다. 또 하이데거는 심지어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했다. 게다가 후기구조주의자들은 언어가 실재와 필연적인 관계가 없다고 하여 인식론적 상대주의를 개화시켰다.

스티븐 핀커의 주장은 다르다. 은유란 무엇인가. 그것은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노력의 도구이며, 체험적 의미에 갇혀 있는 인간이 새로운 추상적인 사고를 표현하는 방식이다. 은유는 해석자에 따라 다양한 의미를 산출한다. 바위나 풀 같은 사물에 대한 표현으로부터 시작해서 드디어는 민주주의를 발명하게 된 인류 문명 과정이 은유 속에서 발견된다는 것이 그의 과감한 주장이다. 그에 의하면 본질이 먼저 있고 언어는 그것을 표현한다는 플라톤적 관념주의는 틀렸다. 인간은 언제나 언어의 한계를 넘어 진화해왔다. 우리의 체험적 진실은 여러 과학적 진실을 이해하지 못한다.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몸으로 느끼며 사는 사람은 거의 없지 않는가. 인간의 지각은 이러한 한계를 가지고 있지만 우리는 언어 속에서 그 극복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고 그는 말한다. 인간 언어의 95%는 본질적으로 은유이며 은유를 통해 새로운 사고로 나아갈 수가 있다는 것이 그가 주는 단서이다.

이러한 도발적인 이야기를 하면서도 이 책은 일반 독자들을 유쾌한 책읽기로 이끈다. 풍부한 예들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욕설과 금 기어에 관련된 부분은 인간의 약점이 어디에 있는가를 잘 보여주며 대통령 선거에 동원된 언어의 상징조작에 관한 분석도 신선하다.

언어는 결국 인간 진화의 산물이고, 여전히 진화 중인 인간의 지각구조가 언어를 만들어간다는 핀커의 생각에 동의하든 안 하든, 이 책은 유머와 위트가 가득한 즐거운 읽을거리이다. 이 분야의 전문학자들에게는 물론 일반 독자들에게도 인지과학의 핵심적 발견들을 이렇게 명쾌하게 요약하고 전달할 수 있는 저자에게 경탄할 뿐이다.

이영준<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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